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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요즘 가끔 머리속에 드는 생각인데 말이야’] 그래도 해피엔딩
오지은(뮤지션) 2010-12-24

스스로를 앞뒤 안 보고 무서운 벨트에 태우는 나의 이상한 버릇

어딘가 가야 한다고 느꼈다. 항상 마지막 경험이 가장 힘들었던 것처럼 생각되는 건 왜일까. 이번 앨범은 이제까지 한 작업 중 가장 힘이 들었다. 마스터링을 끝내고 나는 진짜로 좀비가 되어 있었다. 내면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이유없는 공격적 성향이, 외면적으로는 비늘처럼 하얗게 일어난 얼굴 피부와 긁는 대로 딱지가 되어 일어나는 몸 피부가 그 증거. 이럴 땐 조금 긴 여행을 하며 인간의 몸과 마음을 되찾아주는 정령석을 찾아 헤매이… 는 게 아니고, 굴 속에서 마늘만 삼칠일을 먹어야 하… 는 것도 아니고, 여하튼 먼 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건 맞는데, 하프 타임은 항상 짧기에 그런 여유는 내가 못 부리겠더라. 엉엉 돈도 없고요. 하지만 무대에 서는 직업이라 적어도 좀비 같은 얼굴만이라도 사람꼴로 돌려놓아야 했다. 그러고보니 예전 홋카이도의 도요토미 온천에서 놀라운 효과를 체험했었지. 호방하게 “그래 가자!” 하기에 홋카이도는 비행기값도 비싸고…. ‘그래, 국내의 보석 같은 온천을 찾아보자, 가볍게 책 몇권만 들고 가서 본격 요양을 해보자!’ 하고 마음을 정했는데….

앨범 준비에 지치고, 여행 준비에 지치고

하지만 딱 맞는 온천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A온천호텔은 시설이 꽤 좋아 보였지만 위치가 10분 만에 북한에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고(이 시점에 그건 좀), 수도권의 B온천은 수질은 정평이 났지만 시설이 너무 여관이라 혼자 몇박을 하기 좀 마음이 편치 않았고(왠지 철컥 하고 방문이 열릴 것 같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C온천은 워터파크는 좋다지만 온천 수질은 예전만 못하다는 평(난 워터파크 필요없는데), 남쪽의 D온천은 시설도 한적하고 물도 좋다지만 고속버스를 타고 5시간20분이나 걸린다고(혼자서 버스 5시간20분은 좀 그렇다. 기차는 좋지만!) 하고 기차로 갈 수 있는 E온천은 숙소 가격에 비해 청소나 이불 상태가 불량하다는 평이 많았다(여행 기분이 뒤집히는 건 한순간). 나, 어쩌면 좋아! 그리고 화요일엔 이 지면의 마감이 있어서 인터넷이 되는 곳이어야만 했다. 여기서 또 탈락하는 숙소가 수두룩. 미리 출발 전에 원고를 보내고 사뿐하게 출발하는 것이 짐도 가벼워지고 인간으로서의 신뢰도 올라가겠지만 나의 인격과 능력이 아직 그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고(에헤헹) 주말에 급이사를 하는 바람에 나는 낙지처럼 침대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한번에 여러 개를 하려고 하면 팔자주름이 깊어지므로 요즘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손쉽게 포기하곤 한다(에헤헹).

‘에잇, 그럼 해외 가는 셈치고 숙소 등급을 올려?’ 하고 검색해보니 아, 억울한 것이다. 호텔에 1인 요금이 따로 없어서 무조건 2인 요금으로 방값을 내야 하니 그게 어찌나 약이 오르는지. 게다가 그런 뻔쩍뻔쩍한 데서 가족 또는 커플이 하하호호하는데 혼자 멀뚱히 있으면 시설이 좋은 만큼 마음은 왠지 더 허해질 것 같고…. 그리고 그런 곳일수록 뚜벅이한테 불편한 교통상황. 악 어느새 어딘가로 떠난다는 즐거운 마음은 싹 사라지고 ‘대체 어딜 가야 하는 거냐!’ 하는 짜증이 가득 차 심지어 이게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미션 ‘피부 정상화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경제적이고도 풍부한 정서적 만족감을 안겨줄 온천과 숙소를 찾아라’ 두둥. 가뜩이나 좀비라서 마음도 협소한데!

하지만 나는 여달 오 선생이니까. 결국 반나절의 검색 끝에 아토피 환자들이 꽤 찾을 정도로 온천의 질이 좋다는, 기차로 갈 수 있는, 혼자 산책하는 맛이 있는 마을에 위치한, 너무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시설의, 인터넷도 되는 소박한 온천호텔을 옆의 섬나라에서 찾아냈다. 그 와중에 비행기를 텍스 포함해 25만원에 예약하고 숙소 3박에 2만1천엔에 예약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네? 덕후의 나쁜 버릇이 바로 이 쓸데없는 자랑질임을 알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사실 나의 진짜 나쁜 버릇은 어느새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것인데 알고보니 이번 온천여행 또한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항상 공항 가는 날에는 잠을 못 자는데 이날도 그랬다. 1초도 못 자고 새벽 5시30분에 집을 나섰다. 버스에서 좀 자려고 했지만 뭔 버스가 30분 만에 공항엘 가나…. 쪽잠을 자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던 와중에 비행기는 1시간 출발 지연. 자투리시간 이용해보겠다고 인터넷회사 고객센터에 전화했다가 20분간 설득만 당하고 정신력 급격히 저하. 비행기가 이륙했는데 난 무슨 전투기에 탄 줄 알았다. 대체 왜 이렇게 급격하게 고도를 올리시는 거죠, 기장님? 착륙 전에는 기상난조로 엄청난 기체 흔들림. 이후 입국심사를 위한 30분 줄서기 콤보로 내 몸과 마음은 어느새 만신창이…. 이후에도 상당한 고난이 있었지만 읽는 분들을 생각하여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결과적으로 전철, 기차를 5번 갈아타고서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시간 오후 4시30분, 총 11시간의 이동. 쉬라고 여행 보내놨더니 대체 스스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거람. 으아아아악!!

1리터짜리 비타민워터와 로열젤리 들어간 영양드링크와 삼각김밥과 어묵을 사와서 방에서 우걱우걱 벌컥벌컥하고 드디어 처음으로 2시간의 꿀잠을 잤다. 맞다, 나 온천하러 왔지. 이 고생을 하면서 찾아왔는데 그저 그러면 어쩐담. 불안을 안고 들어간 온천은 다행히 참 좋았다. 물은 오렌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진했고 별로 오래 들어가 있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확 좋아졌다. 거기 비치되어 있던 마유(말기름) 샴푸를 썼더니 머리가 마치 고급 살롱에서 만든 컬처럼(또는 메가데스의 데이브 머스테인처럼) 탱글해졌다. 오오!

내 귀에 착 감기는 앨범, 온천으로 피부는 탱탱

이제 좀 쉬는 기분이 드는구나… 하며 방에 돌아오니 휴대폰에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스케줄이 착착 잡히고 있었다. 누가 날 찾아주는 건 기쁘고 고마운 일이지만 머리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여기에 와도 컨베이어 벨트는 착실히 움직이고 있구나. 아, 컨베이어 벨트에 잠시 내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도 지금 ‘피부 정상화 특설 라인’이라는 컨베이어 벨트에 타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남이 억지로 앉힌 벨트라면 어떻게 해야 뛰어내릴까, 날 여기 왜 앉히셨나요, 원망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직접 올라탄 벨트이니 내릴 수도 없고 원망도 못한다. 남이 가라고 한 여행이라면 이를 부득부득 갈았겠지만 내가 가겠다고 한 여행이니 할 말 없네 쩝. 내가 만들겠다고 한 앨범이니 힘들어도 할 말 없네 쩝. 이 벨트들, 상당히 험난하여 누군가가 “그 벨트 타서 좋으시겠어요” 하면 속으로 조금 발끈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11시간 걸려 찾아온 온천물은 놀랄 만큼 좋았지, 하반기를 꼬박 쏟아부어 만든 앨범은 적어도 내 귀에는 참으로 좋지. 이거야말로 해피엔딩 아닌가. 인생에 잠깐이나마 ‘엔딩’을 경험하는 것, 무언가 남기거나 정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복받은 건데 그게 ‘해피’하기까지 하다면 그건 상당한 복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를 앞뒤 안 보고 무서운 벨트에 태우는 건 분명 나의 나쁜 버릇이지만, 해피엔딩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니 일단은 조금 더 이 습성대로 살아볼까 한다. 팔자주름은 걱정되지만!

일러스트레이션 강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