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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시네마틱한 서울의 풍경이로다

평론가 정성일의 감독 데뷔작 <카페 느와르>의 성취와 아쉬움

개인적인 일로 2주간 영화를 거의 보지 못하다가 개봉일이 며칠 지난 뒤 정성일의 감독 데뷔작 <카페 느와르>를 봤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던 걸 감안하면 아주 뒤늦게 본 셈이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의 영화를 미리 보지 않은 것은 물론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두근두근하는 심정도 있었지만 영화의 현학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영화에 관해 나온 사전정보, 정성일 감독의 말로도 전해진 ‘책의 리얼리즘’ 따위의 수사에 부정적이었다. 한국에서 누구보다 많은 영화를 본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연출작에서 새로운 영화의 꼴을 발명해야 한다는 당위를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고전소설 두편의 내러티브 얼개를 이어붙이고 그 소설에서 따온 대사를 원전 그대로 배우들에게 읽게 한다는 부분적인 발상은 영화를 보기도 전에 낙담시키는 현학의 흔적이 있다.

발터 베냐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으로만 채워진 책을 쓰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비평가이자 감독으로서 정성일은 아마도 비슷한 꿈을 품은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 남자’이고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내 예상은 틀렸다. <카페 느와르>는 내 짐작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서사의 진행방향은 예측했던 대로 상당 부분 진행되는데도 이 영화가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육화된 통증을 전해준다는 것이 놀라웠다. 정성일은 이 영화에서 명확해 보이는 구조물 안에 명확하지 않은 모호함의 층을 골고루 쌓은 뒤 허물어질 듯 지탱되는 리듬으로 끌고 간다. 언뜻 보면 <카페 느와르>는 적어도 정성일의 글을 읽어본 관객에게 특이체질의 코미디를 겨냥한 듯한 인상도 풍긴다. 많은 것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인용 방식이 다양해서 어떤 것은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도 있고 패러디한 것도 있으며 메타 논평한 것도 있다. 숨은그림찾기식으로 배치해놓은 것이 아니라 대개는 알 만한 것으로 배치해놓았다.

관념이 아닌 육화된 통증을 전해주다니

그것들은 그냥 구조물의 일부일 뿐이다. 기껏 해봐야 퀴즈의 재료에 불과할 뿐인 이런 인용의 조립과 배치로 정성일이 텍스트를 축성하겠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사의 직접적인 소재가 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에서 가져온 많은 대사도 마찬가지다. 음악 사용도 그렇고 자신이 좀 기초교양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들로만 채워넣었다. 기존 재료로 그릇을 꽉 채운 다음에 정성일은 그걸 맥거핀으로 미끼삼아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나는 영화에서 액션이 벌어지는 순간과 액션이 적거나 없는 순간의 대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카페 느와르>는 명시적인 액션보다는 액션이 벌어지지 않거나 사소한 순간들이 비상한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서구의 문학텍스트를 2008년 서울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빌려와 뭔가 내러티브를 작동시키는 척한 다음 그 핑계로 서울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기분, 공기, 그것들을 흡수해 체화한 정서적 색깔을 스크린의 이미지에 배어나게 하는 연출 전략을 쓰고 있다. 나 같은 관객에게 적어도 그의 연출 전략은 꽤 효과적이었으며 이미지의 잔상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갈 때에도 차곡차곡 쌓여 영화가 끝날 때 즈음이면 머리와 가슴에 감당하기 힘든 덩어리로 남아 있는 느낌을 준다.

어떤 영화인들은 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해 이미지를 갖다붙이고 또 다른 영화인들은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스토리를 갖다붙인다. 스토리는 휘발되지만 이미지는 남는다. 정성일은 후자에 속하는 감독이다. <카페 느와르>의 주배경인 서울 청계천, 남산 한옥마을, 광화문 사거리, 한남대교 부근, 그리고 곧잘 화면 배경에 잡히는 남산타워 등이 서울의 시각적 지표로서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불온한 공기를 화면에 주입시키고 관객에게 감염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전 텍스트에서 빌려온 실연의 모티브를 가장하고 있는 이 영화의 멜랑콜리한 정서와 희미한 배색의 희망적 정조는 슬픈 로맨스영화의 외관으로 포장된 동시대의 집단적, 정서적 색깔을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화면에 입힌 끝에 나온 결과다. 이 먹먹한 슬픔이 추상적인 만큼이나 공허한 정조로 떠돌지 않고 다양하게 확장되는 정서구조로 배어 있는 것이 <카페 느와르>의 영화적 성취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통일돼 있지 않고 아슬아슬하며 지나치게 길고 때로는 산만하다. 정성일 감독의 생각이 어떻든 그걸 존중할 수밖에 없지만 관객 입장에서 그의 영화는 좀 길다. 이를테면 영화 중반, 2부에서 정유미가 연기하는 여주인공 선화가 10여분간 신하균이 연기하는 남자주인공 영수에게 독백하듯이 대화할 때 문어체로 흘러가는 그녀의 말은 낭송회에서 듣듯이 귀에 박히지 않는다. 이럴 때 그 말은 배우를 통해 육화된 말이 아니라 배우가 아무리 있는 기운을 다해 연기하고 있어도 자동인형이 말하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길게 고정된 화면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말보다도 그 말을 전하는 캐릭터의 존재였다. 어떤 말로도 정의되고 포착될 수 없는 정념의 형용사들이 정유미라는 배우의 육체를 통해 발산되는 이 장면은 충분히 인상적이지만 동시에 그 장면이 그렇게 길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길고 메타논평의 인상도

별다른 심리적 맥락없이 주어진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이미 다른 텍스트에서 끌어온 것이고 관객 입장에서 이미 맥락을 알고 있다고 전제한 뒤에 전개되는 스토리를 품고 있다. 여기서 세세하게 되풀이되는 문어체 대사의 기능은, 문학과 영화의 교호작용이라는 것 말고도 영화 속에 삼투된 주인공들의 체험으로 접수해야 한다는 또 다른 당위가 있다. 그것이 스토리를 진전시키기 위한 맥거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대다수의 대화장면들은 웅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들이 큰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고 느꼈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은 말하고 있을 때보다 말하고 있지 않을 때 곧잘 더 인상적이며 기계적으로 말을 읊을 때조차도 말의 전달보다는 그 말을 실행하는 배우의 존재감이 더 육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너무 길고 말에 대한 할애시간이 과하다.

영화의 인용도 마찬가지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오마주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인용은 뭔가 비평가 정성일의 메타논평 충동의 산물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올드보이>와 <괴물>과 <살인의 추억>과 <행복>과 <극장전> 등이 나오는데 어떤 것들은 맥락을 추스르기 힘들다. <올드보이>의 장도리신을 의식하고 찍은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폭력의 분출과 부조리한 상황의 접합이라는 박찬욱 영화의 브랜드는 폭력이 분출될 듯하다가 멈추고 부조리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희비극을 공존시키는 가운데 전체적으로는 뭔가 비판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정성일이 여타 인터뷰에서 <카페 느와르>의 숨어 있는 메시지를 ‘죽지 말고 살아라’로 삼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폭력과 죽음에 관한 최근 한국영화의 절충적인 작가들의 태도에 관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완곡하게 비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럴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전체적으로 섬세한 이 영화에서 다소 난폭하게 거친 이음새로 여겨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요컨대 고전 텍스트의 인용을 포함해 인용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이음새를 감당하기 힘든 것이고 특히 내러티브의 대전제인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2008년 서울의 풍경으로 접수돼 맥락화될 수 있다고 하는 정성일의 창작적 신념에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 느와르>는 차이밍량이나 허우샤오시엔과는 다른 도회적 실존의 무드를 정성일식으로 시네마틱하게 연출한 창작물이며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 많은 (심지어 너무 많은) 영화라는 것에 기쁜 마음으로 동의하게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즐겼고 몇번 더 보고 싶으며 나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로 컬렉션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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