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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앤더시티] 환락의 제국, 미국 역사를 만들다
안현진(LA 통신원) 2011-01-21

금주령 시대 애틀랜틱시티를 무대로 한 갱스터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

1920년 1월19일, 애틀랜틱시티의 보드워크(boardwalk: 해변을 따라 길게 깔린 판자 산책로)는 밤이 깊어갈수록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유모차에 술병을 가득 담은 젊은 부부가 지나갔고,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의 뒤를 따라 거대한 관에 거대한 술병을 눕힌 우스꽝스러운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한껏 꾸미고 나온 사람들은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마셔댔지만 시곗바늘은 정직하게 자정을 향했다. “10, 9, 8, 7, 6, 5, 4, 3, 2, 1.” 카운트다운 뒤 적막이 흐르고, 무대 위의 트럼펫 연주자는 느릿한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주류판매 및 양조금지’를 골자로 하는 금주령이 미국 전역에 시행된 1920년 1월20일 0시, 술의 죽음을 애도했던 애틀랜틱시티의 풍경이다. 실제로 이런 이벤트가 벌어졌는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HBO>가 야심차게 내놓은 시대물 <보드워크 엠파이어>가 펼친 상상에 의하면 그날 이 도시는 그렇게 술잔 속에서 흥청거렸다.

“훌륭한 갱스터 드라마가 될 DNA를 타고났다”

<보드워크 엠파이어>는 미국의 유료 케이블 채널인 <HBO>가 <소프라노스>의 후속타로 2006년부터 준비해온 ‘물건’이다. 넬슨 존슨의 책 <Boardwalk Empire: The Birth, High times, and Corruption of Atlantic City>가 바탕이 된 이 드라마를 두고, <타임>은 “훌륭한 갱스터 드라마가 될 DNA를 타고났다”고 소개한다. <소프라노스>의 작가 테렌스 윈터가 펜을 잡았고, <좋은 친구들> <카지노> <갱스 오브 뉴욕>의 감독 마틴 스코시즈가 제작에 참여한 덕분이다. 마틴 스코시즈는 드라마의 파일럿 에피소드를 직접 연출했는데, 이 한편의 제작비가 무려 1800만달러에 달해 미국 TV시리즈 파일럿 역사상 최고 제작비를 기록하기도 했다. 뉴욕 브루클린의 이스트 리버를 따라 100m 길이의 ‘보드워크’ 세트를 만드는 데만 500만달러가 투입됐고, 1920년대를 드러낼 의상, 소품, 옥외광고판 등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디테일에 더해 CG로 후반작업까지 공들인 탓일 거다. 하지만 그 결과는 흡족한 것 이상이다. 최근 <라이프>는 애틀랜틱시티의 호시절을 기록한 40여장의 흑백사진을 ‘The Real Boardwalk Enpire’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는데, <보드워크 엠파이어>는 그 사진들에 숨결을 불어넣은 듯 생생한 ‘컬러판’ 1920년대를 브라운관으로 소환했다.

1920년은 애틀랜틱시티의 황금시대로 향하는 도약의 해였다. 19세기 후반부터 해안가를 따라 우후죽순처럼 호텔이 세워지고 11km에 달하는 보드워크가 완성되는 등 관광지로서의 급속한 성장도 호황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드라마는 금주령의 시행에 도시 성장의 공로를 넘긴다. 성장이라고 부르기엔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금주령은 세상을 바꾸었다. 술꾼들은 밀주 한잔을 마시려고 종전보다 비싼 값을 지불했고, 그물은 물고기 대신 술병을 낚아올렸다. 정치가는 갱 조직과 손을 잡았고, 갱 조직은 도시의 전설이 됐다. 위스키 500병이 가짜 술 3000병으로 둔갑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니 밀수는 물론 제조, 밀매에까지 갱 조직이 손을 뻗지 않은 곳은 없었다. 알 카포네, 아놀드 로스틴, 찰스 ‘러키’ 루치아노 등이 바로 1920년대가 잉태한 전설들이다.

그리고 애틀랜틱시티에는 이노크 ‘너키’ 존슨이 있었다. 도시의 모든 지갑을 제 것처럼 열고 썼다는 전설의 이노크 존슨은 1911년 뉴저지주 애틀랜틱 카운티의 회계사로 선출된 뒤 1941년 탈세혐의로 10년형을 받고 연방교도소에 수감될 때까지 이 도시의 경제권을 휘두른 실세다.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존슨을 허구화한 너키 톰슨(스티브 부세미)이 시장, 보안관, 대통령 등 왕좌에 앉힐 꼭두각시들을 점찍어 선출시킨 뒤 마음껏 조종하는 것을 보면 실존 인물인 존슨이 얼마나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는지 쉽사리 짐작이 간다. 남녀노소, 백인, 흑인, 정치가, 깡패, 장애인을 막론하고 누구든 부탁이 있으면 너키를 찾아가고, 그는 너그러운 씀씀이로 인기를 얻는다. “내가 잘살 때, 모두가 잘살았다.” 어차피 너키가 쓰는 돈은 애틀랜틱시티를 돌고 돌아 다시 그의 지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 손해 볼 것도 없었다.

2010년 12월5일 12번째 에피소드로 시즌1의 막을 내린 <보드워크 엠파이어>는 금주령이 시행된 첫해, 해안가 관광도시의 풍경을 그려낸다. 너키와 도시의 실세들은 금주령이 시행되자 얼씨구나 축하주를 마셨고, 그 잔을 내려놓기 바쁘게 뉴욕, 시카고 등 주변 도시의 마피아들이 애틀랜틱시티로 모여들었다.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주와 경계를 맞댄 동시에 대서양과 인접해 육로와 해로를 이용한 수송이 용이한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시카고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의 마피아 제임스 콜로시모와 조니 토리노, 그리고 당시에는 말단 부하였던 알 카포네(스티븐 그레이엄)가, 뉴욕에서는 조직범죄의 ‘킹핀’ 아놀드 로스틴이 ‘러키’ 루치아노를 대동하고 너키를 찾아온다. 동부마피아연합이라도 차릴 법한 이 모임의 첫 거래는 그러나, 너키의 수하 지미 다모디(마이클 피트)가 뉴욕으로 보내는 수송차를 공격하면서 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놀드 로스틴의 뒤를 쫓던 연방요원 넬슨 반 알덴(마이클 섀넌)을 애틀랜틱시티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이야기에 여자가 빠질 수는 없는 법. <보드워크 엠파이어>의 여자들은 그저 보기 좋은 꽃에 그치지 않는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참정권)을 주지 않으면, 여자들은 남자들이 원하는 것(술)을 막을 방법을 찾죠.” 가난한 제빵사 보조의 미망인에서 나중에 너키의 애인이 되는 마거릿 슈로더(켈리 맥도널드)의 입을 빌려, 드라마는 금주령 시행의 정치적 배경과 여성참정권 사이의 분명한 연결점을 드러낸다. 쾌락의 도시를 무대로 하다보니 위험한 꽃들도 만발한다. 입만 열면 섹스를 말하는 너키의 여자친구 루시(파즈 드 라 후에르타)나, 13살에 지미를 낳은 뒤 쇼걸로 평생을 살아온 질리언(그레첸 몰) 역시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전쟁터에서 에스트로겐을 발산하며 극의 균형을 잡는다.

사실 <보드워크 엠파이어>의 초반은 약간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파일럿에서부터 중요한 인물 대부분이 등장하고 시간순서가 뒤섞이기 때문에 집중이 어렵고, 에피소드 4편쯤 지난 뒤에야 복잡한 이해관계와 출생의 비밀도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즌1의 후반에 다다를수록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고 인물들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를 거치듯, 하나둘 진면목을 드러낸다.

사실과 허구 사이, 매혹이 살아있다

뒤늦은 감이 있어도 너키를 연기하는 스티브 부세미에 대해서는 꼭 언급을 해야겠다. 주연보다는 인상 깊은 조연으로 명성을 쌓아온 부세미는 <보드워크 엠파이어>를 통해 그가 가진 스펙트럼의 양극을 오가는 배우로서의 절정을 보여준다. 창백한 안색, 주름진 피부, 뾰족한 송곳니 등 영웅에 가까운 외모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외모의 부조화가 처세술에 능통한 너키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보드워크 엠파이어>의 가장 독특한 지점도 부세미가 연기하는 너키 톰슨을 통해 드러난다. 실존 인물 이노크 존슨에 대해 알려진 사실과 일련의 루머들은 허구의 인물인 너키 톰슨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드라마에 픽션으로서의 재미와 논픽션으로서의 무게를 동시에 부여한다.

어쩌면 <보드워크 엠파이어>가 ‘물건’인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이 될지 모른다. 애틀랜틱시티는 1976년 라스베이거스보다 45년이나 늦게 도박장 운영이 합법인 도시로 인가를 받았지만, 이전까지 공공연하게 카지노를 운영해온 ‘세계의 놀이터’였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어른들을 위한 원더랜드’라는 별칭들 역시 사막 위에 세워진 ‘신시티’에 뒤지지 않을 어둠의 역사를 드러낸다. <보드워크 엠파이어>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담으려는 과욕을 부리는 대신에 역사적 편린을 퍼즐 조각으로 이용한다. 역사가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을 사실과 허구 사이의 설명되지 않는 경계가 <보드워크 엠파이어>의 가장 큰 매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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