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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삶을 체험하려는 태도를, 보라

한국 다큐멘터리의 진화 보여준 이강현 감독의 <보라>

<보라>

한국독립영화협회로부터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지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 몇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은 이강현 감독의 <보라>였다. 도무지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 감을 잡을 수 없게 139분 동안 펼쳐지는 영화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보라>에 관해 다음과 같은 간략한 보도자료를 볼 수 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하면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근로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관리 업무를 맡은 보건관리 대행기관의 산업의학 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번씩 보건관리(작업환경점검, 건강 상담, 직업병 상담)를 현장에서 받도록 되어 있다. 이 영화는 위 법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를 1년여간 촬영한 기록물에서 출발한다.”

<보라>는 그게 전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무런 설명없이 전개되는 영화는 전문의들이 노동자들을 진찰하는 장면, 실제 공장 작업 현장을 둘러보는 장면, 회사쪽 직원들과 보건기관 직원들이 상담하는 장면 따위를 산만하고 느리게 이어붙여놓았다. 처음에는 이것들이 어떤 체계 자체를 아예 거부하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만큼 <보라>는 끈질기게 현실을 탐색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어떤 의미도, 극적 상황도, 인식적 지도 그리기도 건져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흘러간다. 노동부 주관의 산업재해에 관한 심포지엄 화면도 중반에 나오는데 몇 마디 인사말이나 발제자의 발표 중간에 음향시설 불량으로 고막을 찢을 듯이 나는 마이크 소음이 들린다. 그게 어떤 맥락에서 끼어드는 장면인지는 당장 알 수 없다. 후반으로 가면 이게 노동자들의 공장작업 현장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십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할머니들의 건강검진과 개별 인터뷰로 이뤄진 단락도 꽤 굵은 단락을 차지한다. 후반부에는 어느 회사의 컴퓨터 서버를 관리하는 일을 주말 파트타임 직업으로 삼은 투잡족 청년의 밤샘 일상을 지켜보기도 하고 전자상가에서 컴퓨터를 수리하는 어느 가게 주인의 디지털 사회의 구성원리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을 듣는 대목도 있다. 이윽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각자의 카메라로 세상을 찍는, 학원에서 사진강좌를 수강하는 이들의 모습을 따라다니기도 한다.

노동, 환경, 이미지의 재현에 관한 분리된 챕터들을 한편의 영화에 모은 야심적인 구성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이런 구성이 혁신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런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새로운 형식을 향한 의지는 형식을 위한 형식의 틀에 갇힐 위험도 어쩌지 못한다. <보라>가 상투적인 노동자편 선동영화의 틀을 깨고 도대체 20세기 개발도상국가의 프레임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노동자들의 착취적인 작업현장 현실과 고대적부터 계승되어온 고된 농사일과 모든 것을 모니터 앞에서 해결하는 컴퓨터 노동의 조건과 이것들을 아우르면서 찍어내야 하는 이미지의 윤리는 무엇인가를 암시적으로 굵게 범주화화려는 의도는(내가 그 의도를 다르게 읽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어쩔 수 없이 관념적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영화는 좀 긴장이 떨어진다. 몸이 군데군데 삭아가는 노동자들이나 나이든 농부들을 보다가 자신들이 즐기는 일에 매진하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을 보여주는 것은 대조적이다. 노동과 레저, 소모와 창조의 이분법으로 명쾌하게 구분할 의도도 없었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영화가 답을 회피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후반부들어 충만하던 시간의 감각이 느슨해진 까닭

그게 왜 그런가를 되씹어보았더니 영화 중·후반까지 충만하던 시간의 감각이 느슨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 자막을 달아 노동법 산재에 관한 항목을 화면에 나열한 뒤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모습과 그들의 작업조건에 대해 조언하는 관과 사쪽과 의료관계자들의 모습이 담기는 가운데 망막에 박히는 것은 어떤 말도 돌파하지 못하는 노동이라는 상황 자체의 밀도다. 카메라가 끈질기게 버텨서서 바라보는 공장과 밭의 일상, 일하고 일하는 사이 직원들끼리 농담과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고 하는 광경에서는 비상하리만큼 밀도가 높은 시간감각이 느껴진다. 때로 그 장면들은 지켜보는 카메라가 꿋꿋하고 어떤 태도도 비춰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다의적인 밀도로 충만해져 비의로 가득 찬 절대공간과 시간으로 고양되는 느낌마저 주는 순간이 있다. 나는 이것이 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이강헌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몇 마디 말로 박제화하거나 몇개의 이미지로 접수되는 선동적 구호의 외피들을 제치고 함께 살아가되 절대 개입할 수는 없는 이미지를 찍어내는 사람들의 직접적 경건함이 앞서 말한 장면들에는 배어 있었다. 영화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자기 노동을 계급적으로 정리한 의식화된 사람들도 있고, 자기 육체가 마모된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존재하며 부품화되는 사람들도 있고, 다큐멘터리의 인터뷰를 거부하며 자기 현실에 냉소적임으로써 자존을 지키려 드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물론 대다수는 주어진 현실을 밥벌이로 여기며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게 정신건강에는 더 좋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식화와 일상화된 계급적 몰지각과 노동 소외의 복판 사이의 갈림길에서 <보라>는 그들의 다양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체험을 접수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인상적인 시도이며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카메라에 담기는 피사체의 입장을 수평적으로 최대한 고려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일 것이다.

피사체 입장을 수평적으로 고려한 윤리적 태도

그에 따라 앞서 말한 대로 <보라>는 말로 구획지을 수 없는 이미지의 다의적인 농도를 짙게 함으로써 관객의 마음에 인장을 남기고 그 인장들은 조금씩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점점 더 확장된다. 온갖 유해한 화학 약품에 노출돼 있는 20세기 산업의 노동자들과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틈나는 대로 게임, DMB, 인터넷을 즐기며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컴퓨터 노동자 사이의 갭은 매우 클 것이다. 모니터로 들여다보는 세상으로 현실을 대체로 안다고 생각하는 21세기의 일상적 미디어 환경과 실제로 약품 냄새를 맡아가며 공장현장에서 버티는 카메라 뒤의 창작자의 입장은 많이 다를 것이다. 영화 속의 한 장면에서 의사들이 공장을 시찰할 때 노동자들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대목은 이에 관해 정곡을 찌른다. 의사 한 사람이 솔직하게 이렇게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환자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공장에서 일하는 어느 중년 여자는 한 시간만 일해봐도 알 수 있다고 대답한다. 서로 악의는 전혀 없이 이해와 공감을 전제로 한 대화에서 튀어나오는 말이지만 이 간극은 실은 무서운 것이다. 김치를 먹어보지 않고 김치에 관한 책과 자료만 갖고 얘기해봐야 김치를 실제 먹어본 것보다 깨달음의 양은 부족한 것과 같다.

<보라>는 이미지와 실제의 그 간극을 굳이 좁히려 들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그 간극의 차이를 이해하게 해주며 뭔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고리의 한 부분에 있다는 것도 덧붙인다. 다만, 지금까지 이 글에서 줄곧 지적한 대로 컴퓨터와 사진을 소재로 한 후반부의 분량이 지금 영화의 버전만큼 필요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방식은 없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 장면들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은 감독의 의도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전까지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미지의 잔영들이 차근차근 지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얼마간의 무력감도 남는다. 그 찍은 이미지를 비평하는 이런 행위 자체도 견딜 수 없는 공허를 느끼게 된다.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으나 그 이미지들을 두고 어느 편이냐고 묻는 사납고 단순한 목소리들이 아우성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이미지를 두고 회의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이미지에 괄호를 치고 판단을 멈추고 있는 사이에 증거로 채택된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현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떤 덩어리들을 회의하게 만든다. <보라>의 중·후반부까지 명료한 말을 거부하면서 뚝심있게 밀어붙이는 힘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실은 그것만으로도 <보라>는 한국 다큐멘터리가 진화하고 있다는 뚜렷한 성과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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