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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시네마나우] <라비아 발키>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아프가니스탄필름아카이브의 기적, 목숨 걸고 영화 문화유산 지켜내

<라비아 발키>(1965)

여기 목숨을 걸고 소중한 영화 문화유산을 지켜낸 영웅적 이야기가 있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게 된 탈레반 정권은 우상 숭배를 금하는 이슬람근본주의의 원칙에 따라 아프가니스탄필름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영화 프린트를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필름아카이브의 소장 필름을 모조리 소각한 뒤 그곳을 무기박물관으로 만들 계획이었다(탈레반 정권의 무지막지한 우상 숭배 금지정책은 결국 2001년 인류문화유산인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당시 아프가니스탄필름아카이브 직원 중 크와자 아흐마드샤를 비롯한 11명은 국가적 문화유산인 영화프린트 중 일부라도 살려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6천여개의 네거티브 필름 릴을 비밀리에 따로 숨겨두었다. 탈레반 군인들은 아카이브에 몰려와 모든 프린트를 불태웠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리고 네거필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들의 무지도 한몫했다). 그들은 아흐마드샤에게 “만약 숨겨놓은 프린트가 있다면 프린트와 함께 당신도 불태워버릴 것”이라 협박했다. 하지만 끝까지 아흐마드샤는 비밀을 지켰고,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 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일부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프린트들은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난 뒤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중에는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장편 극영화 <라비아 발키>(1965)도 있었다(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영화는 1946년작 <사랑과 우정>). 라비아 발키는 페르시아 문학사에서 전설적인 여류 시인이며, 비극적인 사랑으로도 유명하다(아프가니스탄은 오랫동안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파슈토어와 함께 페르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쓰고 있다). 이 작품은 탈레반 정권에 있어서는 파괴대상 1호 작품이었다. 라비아 발키는 9세기경의 실존인물로 아프가니스탄 유일의 여왕이기도 하다(일설에는 그녀가 공주였다고 하나 영화에서는 여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녀는 오빠 하레트의 터키인 노예 박타쉬와 사랑에 빠져 사랑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이를 수치로 여긴 그녀의 오빠가 그녀를 체포하여 욕실에 가둔 뒤 경정맥을 잘라 죽게 했다. 라비아 발키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피로 욕실 벽에 여러 편의 시를 남겼고, 이 시들은 가장 아름다운 연애시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녀의 시는 이슬람 문학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슬람 사회에서 특히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1965년에 발표된 영화 <라비아 발키>는 아프가니스탄영화 사상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탈레반에 라비아 발키의 삶과 시는 불온 작품이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을 연출한 압둘라 샤아단과 라비아 발키 역을 맡은 시마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사실도 영 마땅치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 <라비아 발키>는 크와자 아흐마드샤와 동료들의 기지와 사명감으로 살아남았다(압둘라 샤아단과 시마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BBC World>의 파슈토어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필름아카이브는 2003년부터 프랑스의 국립필름아카이브 INA와 내셔널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 이니셔티브의 지원으로 아프가니스탄영화 프린트 복원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태껏 공개되지 않았던 희귀한 영상자료들도 발견되었다. 특히 60년대 다큐멘터리 중에서 그러한 자료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아프가니스탄필름아카이브 직원들의 영웅적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탈레반 잔당들의 아프가니스탄필름아카이브 폭탄테러 시도가 이어지는가 하면 필름 프린트의 보관 여건이 점점 열악해지고 있으며, 디지털 전환 작업도 난항을 겪고 있다. 다행히 2009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필름아카이브에서 장비와 전문인력을 지원해주어서 프린트 손상을 막거나 지연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필름을 지키려는 아프가니스탄필름아카이브 사람들의 고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