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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성장, 퇴행을 위한 알리바이

<글러브>를 통해 살펴보는 한국영화에 대한 어떤 전망

<글러브>는 너무도 투명해서 감춰진 이면이 없는 표면이 전부인 영화처럼 보인다. 더구나 실화를 소재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를 더욱 투명한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착시현상을 낳는다. 하지만 실화 소재의 영화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실화 자체가 아니라 그에 생기를 불어넣는 허구의 차원이다. 대체로 너무 투명한 영화들은 비평적 관심을 끌기 힘들지만, <글러브>는 한없이 투명하게 보이는 허구의 차원이 이전의 영화적 흐름들로부터 연속과 단절의 궤적을 그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물론 그것이 단절일지 더 이전의 것의 회귀일지 아직은 선명하지 않다. 오류의 가능성을 무릅쓴(혹은 오류이기를 바라는) 한국영화에 대한 전망.

강우석의 영화 연출은 투명함과 투박함의 경계에 위치하곤 한다. 그의 영화에서 투명성(또는 투박함)은 인물의 자기주장(그것은 주로 강우석의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의 표명이기도 하다)을 담아내는 방식, 또는 그러한 인물과 관객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에서 좀더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강우석처럼 인물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그것도 정면에서 관객에게 들이미는 감독은 드물다. 강우석 영화는 그만의 자신감이 묻어나곤 했는데, 이는 무엇보다 감독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관객이 듣고(보고) 싶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믿음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순간, 강우석의 영화는 투박과 투명의 경계선에 선다.

<글러브> 역시 강우석 영화답게 반복적으로 인물을 정면에서 잡는다. 군산상고와 연습경기 이후, 김상남이 도로 한복판에서 삶의 교훈을 늘어놓는 장면은 인물과 관객을 직접적으로 조우시키려는 강우석의 연출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통의 영화라면 좀더 측면으로 카메라를 위치시키겠지만, 강우석은 관객이 청자 자리에 ‘좀더 가까이’ 위치하기를 원한다. 물론 영화에서 리액션(또는 응답)은 특정 인물(들)의 몫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지만, 강우석은 그것이 화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해도 실질적인 리액션의 주체는 관객(의 감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글러브>에서 이러한 연출은 학생들이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김상남의 설교에 시선으로 응답하는 장면, 부모님과 교장선생님 앞에서 무릎 꿇고 야구부의 존속을 주장하는 장면, 시합을 중단시키려는 김상남에게 계속 경기를 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하는 장면 등에서 영화는 야구부원의 얼굴을 관객과 직접적으로 대면시킨다.

물론 영화는 카메라의 매개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대상도 투명하게 관객과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강우석은 인물의 얼굴과 그 시선, 그리고 대사 등이 관객과 무매개적으로 만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를 위해 그 순간만큼은 영화(카메라)가 투명해져야 한다고 믿는 감독이다. 물론 그것이 때로는 영화를 투박하다 못해 설교적으로 보이도록 하고, 본의 아니게 극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소격 효과를 만들면서 실패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 종종 발생하지만(<한반도>는 이에 대한 가장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강우석은 이러한 믿음을 철회하지 않으려 한다. 강우석이 우회보다는 직선으로 뻗어가기를 즐기는 자신의 취향을 감추지 않을 때, 그의 영화는 투명과 투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물론 전작이었던 <이끼>에서 강우석은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취향과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글러브>의 강우석은 영화가 투명해져야 한다고 믿는 순간만큼은 그 누가 뭐라 해도 (김상남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자신의 곤조대로 공을 던진다.

모방1, 강우석의 교육학 또는 자기 반영

극적 장애물이나 갈등을 최종 경기를 통해 극복하고 해결하는 것은 스포츠영화의 전형적 관습이다. 또한 이러한 장르에서 의욕을 상실한 과거의 스타 선수가 열정만으로 가득한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잊었던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설정이 포개지는 것 역시 낯설지 않다. 상투적인 것들의 안정적 조합이 늘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상투적인 것들의 식상함을 이겨내고 관객의 감정을 파고드는 꽤 성공적인 상업영화다. 이러한 면에서 <글러브>가 가장 닮은 영화는 <말아톤>이다. 실제로 <말아톤>의 코치와 선수의 관계는 <글러브>에서 김상남과 야구부원의 관계로 그대로 반복된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의 유사성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며 한 단계 성장하는 일종의 성장담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말아톤>에서 인물간의 모방 관계는 영화의 핵심이었다. 자폐증 아들과 어느덧 그 아들을 닮아버린 엄마의 모방이 한편에 있다면, 또 다른 한편에는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라는 엄마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는 초원(조승우)의 모방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또다시 어머니의 모방을 낳으면서 가족의 통합이 완성된다. <글러브>가 <말아톤>만큼 모방이라는 설정이 극을 풍요롭게 하는 데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 영화 역시 인물간에 이뤄지는 ‘상호 모방’이 그들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한편으로 <글러브>는 김상남을 모방하는, 또는 그의 가르침을 내면화하는 야구부원들을 담는다. 이 관계에서 <글러브>가 정의하는 모방은 무척 현실적이다. <글러브>는 모방을 다음처럼 정의한다. 모방: 빼먹을 게 있으면 무조건 밑으로 기어들어가 빼먹을 거 다 빼먹는 것. 이것이 <글러브>가 제시하는 모방의 세계고, 강우석 나름의 교육학이다. <글러브>는 상대편 수비수의 다리를 향해 돌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승패와 상관없이 즐기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판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2루에 베이스러닝을 몸소 가르치는 과정에서 김상남과 나주원(유선)이 대립할 때, 영화는 철수(조진웅)의 등장을 통해 이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상황을 종결한다. 하지만 <글러브>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영화에 가깝다. 강우석이 볼 때, 주어진 상황을 즐긴다는 것은 살아남을 여력이 있는 자들의 여유 부리기일 뿐이다. <글러브>는 김상남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야구경기의 묘사에 있어 감독의 개입을 대체로 자제한다. 김상남은 함께 훈련하면서 야구부원들보다 앞에 서서 달리고, 그들보다 한 바퀴 더 달리는 것을 몸소 보여줄 뿐이다. 야구부원들에게 경기에서의 1승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면, 감독의 개입 없이 그들 스스로가 경기를 풀어가도록 하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강우석이 몸으로 터득한 생존 원칙이다.

<글러브>의 경기장면은 그 어떤 영화보다 과장없이 담백한 맛이 있다. 김상남은 연습경기 상대였던 군산상고 야구부에게 말한다. 밟고 싶은 만큼 밟으라고, 다만 가엽게 보거나 동정하지는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후 영화는 성심학교 야구부가 군산상고에 어떻게 밟히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이 장면은 다소 감상적인 음악이 깔려 있다 해도 대체로 사실적이다. 영화는 그라운드에 나뒹구는 모습을 너무도 투명하게 관객의 시야에 노출시키며, 그들이 아름답지 않냐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한 경기 한 경기가 세상의 편견과 싸우는 것이자 만만치 않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 몸부림이라면, 강우석에게 이 장면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대상이고, 그것이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들을 짧게 처리하지 않은 이유다. <글러브>는 최근 주류 한국영화의 흐름을 등지며 살아남으려는 인물(들)의 발버둥을 ‘그 어떤 냉소도 없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글러브>가 강우석 나름의 교육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감독이자 제작자로서의 강우석 자신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배알이 꼴리면 내 밑으로 들어와 빼먹을 것이 있으면 다 빼먹어보라는 모방의 요구는 김상남이 아니라, 영화 후배들에 대한 강우석의 교육학인 셈이다. 강우석이 보기에 후배 영화인들은 자신에게서 살아남는 법을 좀더 배워야 한다. 배알이 꼴리더라도.

<글러브>는 또 다른 한편으로 김상남이 야구부원을 모방하며 잃어버렸던 자신의 초심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모방의 관계는 <글러브>를 좀더 넓은 맥락에 위치하도록 한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글러브>의 투명성이 무엇을 누락시킨 대가로 가능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본질적으로 투명한 매체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글러브>가 청각장애인을 관객과 투명하게 대면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실화의 투명성이 허구에 의해 뒷받침될 때) 허구가 과연 올바르고 정당한 방식으로 실화와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방2, 퇴행적 공동체주의

<글러브>는 한국영화에 만연한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개인에게 공동체라는 울타리를 선물하려 한다. <글러브>는 지난해 한국영화에서 주요 문제의식이었던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문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연속선을 가지면서도, 그것이 고립된 개인의 묘사에서 벗어나 특정한 공동체주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단절의 지점을 내포한다. <글러브>의 공동체주의는 인물들의 성장을 담보한다. 야구팀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누군가는 초심을 되찾고, 누군가는 삶의 동력을 얻는다. 하지만 청각장애인 야구부를 매개로 하는 공동체주의는 무엇을 기반으로 존립 가능한 것이었을까? <글러브>는 주어진 환경과 싸우는 야구부원들의 모습을 투명하게 비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이에 의문을 품었던 이는 야구부를 떠난다). <글러브>는 늘 외부로부터 그들에게 무언가가 강제된다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그들로부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질문을 누락시킨 것은 이 영화가 갖는 이중적 태도다. <글러브>는 청각장애인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삼는 영화에 가깝다. <글러브>는 그들의 체험 속에 녹아 있는 소리없는 야구를 보여주지 않는다. 청각장애인이 체험하는 소리없는 야구가 아니라, 야구하는 그들을 관객인 우리가 바라볼 뿐이다. 이는 <글러브>가 세계를 감각하는 청각장애인의 영화가 아닌,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환상을 위한 영화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글러브>는 우리가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원으로부터 모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순수한 열정이라 말하는 듯하지만(김상남이 그러했듯이), 이를 위해 누군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동체 속으로 무조건적으로 통합되어야만 한다.

<글러브>가 청각장애인에 대한 영화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정주의적인 관점에서만 그러하다. 그러니까 청각장애인에 대한 영화의 태도는, 그들을 벙어리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청각장애인’이 정식 호칭임을 알려주는 것 이상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교정주의 역시 그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무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공동체의 순진무구한 열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세계에 대해 질문하는 주체의 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점은 <글러브>가 이끌 (수도 있는) 공동체주의에 내재한 위험이다. (겉으로는 <글러브>와 전혀 다른 세계를 담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공동체주의의 비극적 최후는 자살의 몸짓으로 일관했던 <실미도>의 공동체가 증명한다. <실미도>의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는 <글러브>에서 순진무구한 공동체주의로 겉모습만 바꿨을 뿐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주체성이 삭제된 순진무구한 공동체주의가 주는 감동은 관객의 퇴행적 정서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글러브>는 자신(또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소년들의 공동체로부터 다시 배우라고, 그들을 모방하며 초심을 회복하라고, 그리고 그것이 인물의 성장이라고 말한다. 한국영화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소년으로 표상되는 질문하지 않는 무지의 시선으로의 회귀였고, 그것이 공동체주의를 가능하게 하곤 했다. 이때 성장은 퇴행을 위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문제는 파편화된 개인들에게 그들을 떠받칠 수 있는 희망으로 공동체가 (재)등장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동체가 또다시 퇴행과 맹목의 텍스트적 징후 속에서 우리 앞에 출현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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