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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더 씁쓸해도 좋았을텐데

가식적이지 않고 선하지만 안전함을 추구한 영화 <혜화,동>

<혜화,동>

민용근의 <혜화,동>은 어른이 된 미혼모의 이야기다. 여주인공 혜화는 고교 시절 사랑했던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남자는 떠났고 아이는 죽어버린 줄 알고 있었다. 동물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철거촌에서 유기견을 데려다 돌보는 혜화 근처에 과거의 애인이 얼쩡거린다. 그는 아이가 살아 있다고 알려주고 그때부터 혜화의 마음도 흔들린다. 엄청나게 굴곡이 많은 스토리는 아니지만 격한 반전과 고저가 살아 있는 연출로 잔잔하게 드라마의 골격을 완성한 영화다. 꽤 잘 만들었다는 평판이 부산영화제 출품 때부터 이미 나돌았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선 여러 상도 받았다.

소녀에서 어른이 된 여자의 주름, 유다인의 얼굴

주인공 혜화 역으로 나온 유다인의 얼굴이 좋고 안정돼 있어서 소녀에서 어른이 된 여자의 마음의 주름이 자연스럽게 잡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 초반에 그녀는 유기견을 돌보고 자신이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의 아들을 돌보며 집에서는 입양되지 못한 유기견들을 돌본다. 개똥 천지인 방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니며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고 거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대는 개들을 다독이며 보살펴주는 혜화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성숙한 면모를 보인다. 홀아비인 병원 원장의 일상을 곁에서 부드럽게 지켜주며 엄마 없이 자라 가슴에 유독 집착하는 그의 어린 아들도 엄마처럼 보살펴준다. 그쯤 해서 이 여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다.

혜화의 주변에 나타나 얼쩡거리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한수가 혜화의 과거 남자친구이며 학생 신분으로 결혼할 계획까지 있었다는 과거가 조금씩 밝혀질 때 이 착한 듯 보이는 영화에 어두운 긴장이 생긴다. 과거 회상장면에서 혜화는 어린 나이에 임신을 했고 겁먹은 듯한 한수에 비해 자신만만해 보이고 행복하다. 그런 그녀를 이해해주는 늙은 엄마와 달리 못마땅한 오빠와 밥을 먹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혜화는 앞으로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다. 이 특이한 낙천성이랄까, 철없어 보이는 쾌활함이 좀 이상해 보였다. 소녀 혜화의 희망은 한수의 집에 엄마와 함께 찾아갔을 때 산산조각난다. 한수는 캐나다 이민을 핑계로 사라졌고 한수 어머니는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자고 한다.

현재의 혜화는 주위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강인함 때문에 성숙해 보인다. 과거의 혜화는 착한 소녀이지만 행복만큼이나 동등하게 다가오는 고통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철없어 보인다. 그런 정체불명의 쾌활은 실제 시련이 왔을 때 여지없이 무너진다. 아이를 낳을 때 혜화의 몸은 두려움에 경직되어 아무런 이상이 없는 출산단계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무의식적인 마음의 저항이 출산을 힘들게 하고 상황은 더 꼬인다. 아이가 저세상에 갔다고 믿는 혜화와 달리 한수는 아이가 살아 있으며 누군가에게 입양됐다고 믿고 있다. 한수가 입양부모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탐문할 때 혜화는 이미 정착된 자신의 일상에서 돌봄을 체화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 대비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황폐한 철거촌을 돌아다니는 탈장된 유기견의 이미지다. 혜화는 그 개를 데려다 보살피려 하지만 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몇개의 인상적인 이미지들이 있다. 탈장 유기견을 유인하기 위해 혜화가 덫을 놓고 덫 안에 치킨을 들여놓은 다음 자신이 직접 시험해볼 때 그만 혜화는 자그마한 덫에 갇힌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혜화 앞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한수가 나타난다. 한수는 혜화를 덫에서 꺼내주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사를 건넨다. 덫은 혜화와 한수 모두 이미 걸려 있는 삶의 형태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다. 그들의 삶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극복된 것이 아니라 내재된 형태로서 그들은 다시 시작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혜화는 이것을 유기견을 돌보고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덮고 있고 한수는 끈질기게 사라진 아기를 찾으려 하는 행동으로 보상받으려 한다.

이미지로 방점 찍든가 극적 강세로 방점을 찍든가

개와 사람은 배척되고 버려진 생명으로 동격의 위치에 놓인다. 아이를 잃은 것과 동시에 혜화는 혜수라는 이름의 어미개와 새끼 개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그 와중에 도망친 하얀 새끼 개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다. 혜화는 탈장된 유기견이 혜수의 새끼라고 믿고 있다. 잃어버린 사랑의 보완, 또는 죄의식의 대속행위로서 혜화가 유기견을 찾아다니는 동안 한수는 실제로 잃어버린 자기 아이를 찾고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가면 이 두 사람의 행위가 수렴되는 대단원의 반전이 나온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극적 주름으로서는 훌륭하지만 나는 거창하게 폼을 잡지 않는 것으로 미덕을 세운 이 영화에서 이것이 최선의 해결책인가에 대해서는 나름 의문이 들었다. 영화 중반 이후 혜수의 주요 생활공간의 사람들이었던 병원 원장과 아들의 묘사는 사라지고 혜수와 한수의 드라마로 집중된다. 영화 중반까지 관객에게 알려준 정보에 기초해 이들의 입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를 잠시나마 찾기 위한 모험이 펼쳐지고 급반전이 일어난다.

이 반전에서 극적 고조 효과가 생기지만 뜻밖에도 극적 에너지가 충만해지지는 않는다. 좀 약하다. 혜화는 이 대단원의 반전을 통해 비로소 사태의 전말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한수의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려는 시도가 부질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한번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들은 사랑했으나 그에 따르는 무게를 견뎌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들이 사랑했던 어렸을 적 한수가 도망간 건 맞지만 혜화도 나중에 사태를 감당하기엔 벅찼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들었던 상처를 뒤로하고 그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 이 영화의 질문이다. 혜화는 용기를 내어 모종의 행동을 취하는데 관객에게 그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이는 혜화가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이 아내와 사별한 뒤 첫사랑이었던 여자와 결합하는 것과 또 다른 짝을 이룬다. 혜화와 한수는 결말에서 찾지 못했던 개 혜수의 새끼를 되찾는다.

모든 것이 대비되는 짝을 이루며 자그맣게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는 <혜화,동>은 누가 봐도 착한 영화이다. 선의로 만들어졌으며 가식적이지 않다. 다만, 이 경우에 극적 장치라는 것은 관객의 눈을 잡아채는 효과를 겨냥하는 만큼이나 얼마간 편리의 도구로 사용되는 위험도 어쩌지 못한다. 수심에 손을 다 넣지 않고 반뼘만 넣고 재는 듯이 <혜화,동>의 드라마는 예쁘게 전개된다. 이것이 절제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과 치유의 순환은 실제 현실의 반영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극적 관습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순환의 그 궤적이 좀 안전해 보인다. 절묘한 극적 반전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렇다. 나는 이것이 끝내 혼란스러웠다. 이 영화는 안전한 감동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여주인공 혜화 역의 유다인은 앞서 말한 대로 좋은 기운을 풍기는 배우이고 이 영화의 감정적 인장을 찍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지만 그녀 역시 정돈된 느낌을 준다. 개인적인 견해로 혜화는 항상 정돈된 느낌을 줄 수 있는 여자는 아니다. 희로애락이 고루 드러나는 얼굴, 별다른 연기를 하지 않고도 드러나는 얼굴은 배우의 좋은 장점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단점이다. 한번도 격하게 그녀의 감정을 카메라가 후벼파고 지나가지 못하는데 이는 감독이 타자의 고통에 여리게 접근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자로서 여주인공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처를 드러내려 하는 카메라는 드라마의 다른 한축인 한수의 감정을 보여주는 데는 또 서투르다. 한수가 겉으로는 감정이 없는 듯이 행동하며 사라진 아이를 탐문할 때의 상태를 보여주는 여러 장면들에서 여주인공을 보여줄 때와는 또 다르게 둔감한 것 같다.

요컨대 <혜화,동>은 더 격하게 치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어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관객에게 불편함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어떤 균형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이미지로 방점을 찍든가, 극적 강세로 방점을 찍든가, 어느 쪽도 아니고 선량한 영화로 타인의 고통을 근심하고 그들의 운명에 공감을 표하는 선에서 멈춰섰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이들이 적지 않겠지만 좀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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