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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창민] 올드하지만 예쁜 로맨스 대배우의 관록에서 배웠다
주성철 사진 백종헌 2011-02-18

<그대를 사랑합니다> 추창민 감독

<마파도>(2005)와 <사랑을 놓치다>(2006). 사뭇 달라 보이는 두편의 장편을 내놓은 추창민 감독이 세 번째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로 돌아왔다. 강풀의 원작을 바탕으로 그는 특유의 섬세한 서정과 인간미를 불어넣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충무로의 젊은 감독 가운데 가장 ‘여백’을 즐기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사에 반응도 늦고 힘도 부치며 체념도 빠른 노년의 주인공들과 함께 걷고 호흡하며 근래 보기 드문 가슴 뭉클한 멜로드라마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국민배우’라 할 수 있는 관록의 네 주인공이 한 프레임에 담기는 순간만으로도 저절로 감동을 자아낸다. 때로는 호통치고 눈물도 흘리지만 종종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영화라는 것이 그것을 만든 사람의 향기를 그대로 담는 그릇이라면 <그대를 사랑합니다>에는 진정으로 그것이 깊이 배어들었다. 추창민 감독을 만나 이순재, 윤소정, 송재호, 김수미, 네 배우와의 작업, 그리고 그 자신의 영화들에 대해 물었다.

-지금 한국영화계에서 무엇보다 실제 노년의 배우들이 당당한 주인공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 영화가 주는 감동과 힘의 원천이기도 하고. =이순재 선생님 등 국민배우라고 할 수 있는 네분을 클로즈업으로 담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흥분됐다. 그러면서 이분들을 TV가 아닌 거대한 스크린에서 클로즈업으로 다가간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고. 클로즈업을 많이 하려고 했던 이유도 그렇다. 그렇게 내가 어떤 연출을 더하지 않고 관록있는 표정만으로도 감동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많았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어떻게 강풀의 원작을 접하게 됐나. =강풀 작가의 만화는 원래 좋아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읽지 않은 작품이 바로 <그대를 사랑합니다>였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노인 만화라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영화화 제의를 받고 3권의 책을 읽는데 너무 좋았다. 반면 영화화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강풀의 만화는 내용이나 설정을 떠나서 그림 자체가 주는 정서가 굉장히 크다. 그래서 어떤 훌륭한 배우라도 강풀 원작의 주인공들과 승부하기는 벅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모두 너무 잘해주셨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데뷔작인 <마파도>에서도 나이 많은 선배 배우들과 작업했다. 작업한 주연급 배우들의 평균 나이를 따지면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고령의 배우들과 작업한 감독이지 싶다.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일 것 같은데 특별한 비결이 있나. =솔직히 낙제점을 주고 싶을 정도로 배우와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웃음) <마파도> 때는 코미디다 보니 감정을 끌어내는 작업을 특별히 할 필요가 없었고 상황에 맞는 연기만 주문하면 됐다. 그래도 능숙하게 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아무래도 감정신이 많기 때문에 좀더 힘든 면이 있었는데, 그렇다 해도 처음 캐스팅할 때부터 워낙 잘하는 분들로 했으니까 내 역할이나 비결은 그다지 신경 쓸 게 못 된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게 있다면 선배님들한테 떼쓰는 거? (웃음) 재롱부리며 떼쓰는 게 아니고 일단 계속 카메라를 돌리면서 “죄송한데 한번 더 갈게요” 그러는 거다. 물론 두어번 더 가게 되면 인상이 굳어지며 역정을 내실 때도 있었지만. (웃음)

-영화는 거의 이순재 단독 주연의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야심을 둔 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맞다. 원작은 권마다 에피소드가 굉장히 많다. 가령 송이뿐(윤소정)의 어머니 얘기, 고향을 떠날 때의 상황 같은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인데 그런 주변 것들보다는 김만석(이순재)과 송이뿐의 로맨스로 가자고 생각했다. 젊은 사람들의 로맨스처럼 풋풋한 사랑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과거 부분을 많이 덜어내고 현재의 로맨스에 집중했다. 그런데 정말 이순재 선생님이 그렇게 로맨스 연기를 잘하실지 몰랐다. 눈물을 바로 흘리시는 걸 보고 너무 놀랐다. 가령 만석과 이뿐의 생일파티 장면도 내가 별다른 요구를 한 게 없는데도, 윤소정 선생님이 우시니까 그걸 받아서 바로 눈물을 흘리시는데 소름끼칠 정도였다. 감정이 그렇게 확 살아나니까 연출자로서는 너무 감사했다.

-TV시트콤을 통해 사랑받은 ‘야동 순재’라는 캐릭터를 슬쩍 삽입한 장면도 재밌었다. (웃음) 야한 영화를 보다가 손녀(송지효)가 나타나자 화들짝 놀라며 TV를 끄는 장면 말이다. =집에서 케이블TV로 야한 영화를 보는 장면인데, 사실 그런 장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겠더라. 그래서 조감독한테 그런 거 재밌지 않겠냐고 해서 한 다리 건너 슬쩍 부탁을 드렸다. (웃음) 그래서 거실에서 혼자 그런 거 보는 장면으로 했는데 선뜻 좋다고 해주셨다. 구체적인 장면은 선생님의 아이디어라 확실히 ‘개그 본능’이 있으신 것 같다. 나는 손녀가 사라지면 다시 켜는 것까지 가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영화 캐릭터상 그건 좀 심하다고 하셔서 지금과 같은 장면이 됐다.

-김수미의 경우 <마파도>에서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다. 치매 노인 역할이라 여배우로서 굉장히 꺼려할 만한 장면들이 많은데 직접 다 하는 걸 보고 놀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방에만 누워 있거나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건데,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더라도 뭔가 생명력을 불어넣는 배우다. 목욕장면도 내가 신경이 쓰여서 이렇게 저렇게 가리고 하면 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까 “몸뚱이 아낄 생각 없으니 마음대로 찍어” 그러셨다. (웃음) 그래도 나로서는 걱정되기도 하고, 또 흔쾌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혹시나 편집해서 덜어내면 죄송하니까 카메라를 멀리 두고 보일 듯 말 듯 ‘얍삽하게’ 처리했다. (웃음)

-윤소정, 송재호 두 배우는 어땠나. =윤소정 선생님은 다른 세분에 비해 최근 영화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게 없으셨으나 열정이 대단하셨다. 사실 연세가 많은 배우들은 새로운 것에 선뜻 달려들기가 체력적으로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도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꽂히면 가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현장에서 가장 편했던 분이고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눴다. 송재호 선생님도 뭐 더 말할 게 있겠냐만, 부드럽고 듣기 좋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할아버지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원래 부산 분이시니까 더 편하다고도 하셨다. 다만 가끔씩 경상도 사람들만 알 법한 단어를 그냥 쓰실 때가 있어서 그런 것만 좀 자제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웃음)

-오달수, 이문식, 송지효 등 예상치 못했던 배우들이 적은 분량으로도 출연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하나같이 호감 가는 캐릭터들이고. =다들 터무니없는 개런티로 출연해준 거나 마찬가지라 너무 감사하다. 송지효씨는 한다고 해서 정말 놀랐는데, 이전에 센 캐릭터를 많이 해서 동사무소 직원 같은 일상의 평범한 생활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달수의 경우 이전처럼 코믹한 모습이되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럴 때 헤어스타일 변화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정말 올백, 대머리, 장발 등 지금껏 안 해본 머리가 없더라. 그래서 ‘아줌마 파마’를 해보면 어떨까 했고 아주 성공한 것 같다. (웃음) 그외 동사무소 직원들처럼 작은 역할이라도 고마운 배우들이 많다. 사실 원작을 보며 확신을 갖고 연출의 뜻을 굳히게 된 것도 동사무소 장면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 좋은 직원들의 모습이었다.

-흥행작이자 데뷔작인 <마파도>와 이후 두 작품은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이후 두 작품이 당신의 정서가 짙게 반영된 작품임은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래서 혹시 <마파도>가 어떤 오해를 안겨준 작품이란 느낌도 있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현실에서 재밌는 사람이 아니니까(웃음) <마파도>와 나를 쉽게 연결짓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뒤에 만든 두편이 좀더 ‘내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제작사나 투자사와 부딪혀가면서 상업영화를 하는 거라면 <마파도>를 통해 배운 게 많다. 코미디가 관객과 가장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윤활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가령 개인적으로는 낯뜨거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걸 관객이 좋아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배운달까. 내가 너무 먹물이 잔뜩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 일주일 반성했었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놓치다> 때는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예고편에 ‘<마파도>의 추창민 감독’이라고 크레딧이 뜨니까 사람들이 웃더라. (웃음) 그런데 정작 영화는 너무 심심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한번 더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됐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만들면서는 ‘거짓말하는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을 가지면서까지 연출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관객과 호흡하고 대화하고 싶은 장면들을 좀더 넣고 싶었다. 가령 만석의 자전거가 불량배로 나오는 이문식의 자동차를 지익 긁으면서 지나가는 장면 같은 건데, 유치할 수도 있지만 많이 웃어주시고 귀엽게 봐주시더라. 뭐 내 의도대로 다 되는 건 아니니까, 나중에 누가 뭐라고 하면 ‘그거 원작에 있는 거예요’라고 말해도 되고. (웃음)

-<사랑을 놓치다>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모두 공간에 대한 감독의 애착을 읽을 수 있다. 도시의 화려함과는 일부러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내가 좀 그런 쪽으로 끌리는데, 그래서인지 스탭들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웃음) 공간을 잘 찾아내면 거의 모든 게 완성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배우들은 자신이 연습한 것과 별개로 막상 그 공간에 도착했을 때 확 젖어드는 경우가 있다. 자연스레 그 장면에 빠져버리는 거다. 분명 연기가 더 좋아진다. 나도 공간이 괜찮으면 배우들과 대화하기도 한결 수월하다.

-지난 두 작품이 멜로영화인데 그 장르 안에서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이 있다면. =배창호 감독님이다. 고등학생 때 등교하다가 <적도의 꽃>(1983)이 극장에 걸려 있는 걸 보고는 재밌어 보여서 그냥 학교 안 가고 조조로 그걸 본 적 있다. 그게 아마 배창호 감독님과의 첫 만남이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같은 작품도 너무 좋아했다. 그러고 보면 당시 배창호 감독님의 영향으로 영화를 꿈꿨던 젊은이가 많았다. 요즘에는 워낙 훌륭한 감독님이 많지만 그때는 동경할 만한 한국 감독이 워낙 적을 때였다. 그리고 동시상영관에서 영화 보는 걸 무지 좋아했는데 <대부>도 그렇게 봤고 그러면서 영화 키드가 된 것 같다. <록키>도 좋아했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요즘도 뭔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 때 늘 꺼내 보는 영화다.

-김연우가 여러 곡을 부른 <사랑을 놓치다>나 루시드폴이 참여한 <그대를 사랑합니다> 모두 음악이 인상적이다. =두 가수 모두 좋아한다. ‘토이’가 소속된 ‘안테나 뮤직’에서 <사랑을 놓치다>를 작업했는데 처음에 염두에 둔 사람은 유희열이었지만 일정상 안되게 됐다. 그러다 다른 소속 뮤지션을 추천받아 전체 스코어를 작곡하고 몇몇 곡을 선곡해 <사랑을 놓치다>를 만들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안테나 뮤직과 했는데 사실 이번에는 예산이 전작보다 더 적어서 여러 명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강민국 음악감독이 모든 스코어를 직접 만들고 친분이 있는 루시드폴과 옥상달빛이 노래를 불러줬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 외에 ‘현’을 넣고 싶었는데 1천만원을 더 쓰면 될 거 같아서 회사에도 떼를 써서(웃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정서적으로 영화에 반영된 게 있나. =그런 건 없다. 내가 영화 속 자식의 입장이 돼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은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향수가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중심은 아니었다. 그래서 좀 내가 ‘올드’하긴 하지만(웃음) 두 주인공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들을 그냥 젊은 배우들과 작업하는 느낌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런 게 <아멜리에>의 판타지처럼 예뻐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해주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부모님에게 바치는 영화, 그런 게 아니라 내 또래의 친구와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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