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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미국… 그 제국의 이면

장르의 요소를 적절히 배치해 드라마의 긴장을 유지하는 수작 <윈터스 본>

버려진 것들의 집산지처럼 보이는 미국 남부의 궁벽한 소촌(小村)을 무대 삼은 <윈터스 본>은 겉만 번지르르한 요즘 할리우드영화들에 대한 해독제와 같다. 장르 컨벤션의 화용론과 민속지적 탐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이 영화는 장르 분류학에 기대어 촌평하기에만 내키지 않는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외견상 미궁에 빠진 아버지의 존재를 탐문하는 10대 여주인공 리 돌리(제니퍼 로렌스)의 여정을 좇는 시골 스릴러이며 사랑과 용기의 가치를 일깨우는 가족영화이자 간악한 세상에서의 생존법을 터득해가는 소녀의 성장영화인 동시에 미국사회의 가려진 진실을 폭로하는 사회파 드라마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요한 표면 아래에서 부글부글 끓어대는 추악함과 적의를 보여주는 대목의 표현들은 노골적으로 코언 형제풍이다.

영화를 즐기는 방법 역시 하나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치부를 들추어 빈궁한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범죄 누아르로 볼 수도 있고, 공동체 질서의 붕괴와 타락을 보여주는 변방의 묵시록, 미국 남부에 대한 고딕 우화 또는 용감무쌍한 10대 여성의 투쟁기로도 손색이 없다. 제임스 디키와 윌리엄 포크너로 대변되는 남부 소설의 신화적인 전통과 결부시키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감독 데브라 그래닉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르 또는 스타일을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한 영화 안에 공존시킨다. 무엇보다 누군가 발설하지 않는다면 외부로 전혀 알려질 일이 없을 것 같은 고립된 산간벽지 마을의 범죄 행태를 묘사한 인디영화가 일으킨 화제성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가혹한 삶에 맞서려는 인물의 행위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이 머리와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동안에도 감정은 날것의 상태로 남아 있는 이야기를 만나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원시와 첨단이 공존하는 아메리카의 인류학

<윈터스 본>은 하나의 지옥을 보여준다. 서서히 달궈지는 군불처럼 느린 템포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맥박을 가쁘게 만들면서 고질화된 범죄와 무시무시한 계략이 잠복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괴기한 지옥도를 그려 보여준다. 말수가 적고, 외지인을 극도로 경계하는 그 동네 사람들처럼 <윈터스 본>은 매 순간 과묵한데 충격은 입으로 말해지기보다 은근한 무드와 징조로 암시될 뿐이다. 여기서 가족주의적 공동체에 기반한 전통 가치와 퇴락한 오늘날의 삶은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교차한다. 목가적인 오지마을 오자크에 만연한 것은 성문화되지 않은 촌락 특유의 관습법이다. 꼭 이 은폐해야 할 범죄가 아니라도 외부로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이곳에서 주인공 리가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는 규율에 저항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이다.

<윈터스 본>이 주는 의외성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로 우리를 데려가는 데에 있다. 고난에 찬 리의 여정에서 놀라운 부분은 성별과 인종, 태생의 분리가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이 혈연 중심의 원시적 씨족 부락에서 그녀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넣는 악귀들이 가깝거나 먼 친척들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조금 먼 가족들과 투쟁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리가 아버지의 행방을 좇는 탐사에 착수하면서부터 <윈터스 본>은 숨통을 조여오는 스릴러가 되지만, 초점은 미국식 유대관계의 파괴와 공동체의 위기에 대한 조망에 맞춰져 있다. 열일곱살 소녀 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육중한 전근대적 집성촌의 권위에 그녀가 저항할수록 위험은 증가한다.

아버지를 찾으려는 리의 미션에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인 친지들이 모여 사는 괴이한 분위기의 마을은 배경이라기보다 하나의 캐릭터다. 한갓진 전원의 풍광을 담은 그림 엽서 같은 오자크의 전경을 찍은 첫숏 이후 영화는 지속적으로 장소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사실 관습적으로 쓰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나 마을을 보여주는 설정숏은 주제를 관통하는 세팅이라기보다 배경일 경우가 많다. 잘 만들어진 세팅은 로케이션 외에도 캐릭터와 주제, 심지어 작가의 세계관에까지 관여한다. 믿건 안 믿건 여전히 미국에는 외지고 고립된 씨족 중심의 시골 마을들이 있는데, 가난과 전통이 사람들을 그 땅에 계속 눌러앉게 한다. 부산스런 도회의 느낌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이곳은 변화하는 미국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폐쇄적인 시골 공동체의 특성이 엄존하며, 수세기 동안 빈곤으로 대표되는 벽촌들이 밀집해 있다. 특히 미주리주에 속한 오자크는 백인, 개신교 중심 공동체이며 18세기 영국 이민자들이 정착해 고색창연한 옛날 방식의 말과 밴조를 베이스로 한 옛날 음악, 세대간 파벌이 온존하는 지역이다. 전자적 소음과는 거리가 먼 공간의 폐쇄성 속에서 리는 어떤 선택과 결정도 불가능한 비참한 상황으로 자신을 밀어넣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행성처럼 보이는 회갈색의 작은 마을은 궁지에 몰린 10대 소녀의 이같은 내면의 풍경을 설명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해 보이는 선택이다.

주류 공동체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지방 소도시를 잠식한 범죄 비즈니스의 파장을 차분히 관찰하는 <윈터스 본>이 범상한 장르영화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실업률이 높은 시골에 침투한 코카인이나 전원(田園)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고만 할 수는 없겠으나 영혼을 말살하는 빈곤과 지역사회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회문제의 뿌리를 슬쩍 건드림으로써 영화는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한다. 실제로 지난 30년간 미국의 서남부 지역에서 마약은 통제불능의 골칫거리였다. 특히 최빈층 노동계급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데 막대한 공(?)을 세웠으며,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경찰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기도 했다. 또 하나의 ‘본’ 시리즈라 명명해도 좋을 데브라 그래닉의 데뷔작 <다운 투 더 본>(2004) 역시 10년간의 코카인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젊은 엄마의 이야기였다. ‘중독’은 <윈터스 본>에서도 이어지는 모티브인데, 오자크 마을 주민들은 죄 무언가의 중독자들처럼 보인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코카인을 흡입하고, 술을 입에 달고 산다. 심지어 리가 가장 가까운 혈육인 삼촌 티어드롭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다 별 소득없이 돌아설 때, 백모는 가는 길에 피우라며 리에게 대마를 건넨다.

제국의 형상을 그리는 사회드라마

중독과 전염. 오자크의 신산스런 풍경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주류사회 바깥에 놓인 공동체들에 닥친 이같은 위기이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이 눈길을 끈다. 영화의 배경은 2010년이고 리의 집 앞 뜰에는 위성방송 수신용 접시가 있지만 그녀는 사슴 고기 샌드위치와 다람쥐 스튜를 만든다. 첨단의 기계문명과 원시적 생존의 양식이 무연히 공존하는 그로데스크. 철부지 동생들에 대한 리의 훈육 방식도 엄청난 간극을 두고 갈린다. 등굣길 동생들에게 철자법에 관한 퀴즈를 내고 숙제 검사를 하는 그녀는 동시에 총 쏘는 법과 다람쥐 가죽을 벗기고 그 내장을 파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자기가 없더라도 어린 두 동생이 생존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들을 훈육해야 하는 처지에 리는 놓여 있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모순이다. <윈터스 본>이 던지는 화두는 실종된 아버지와 무너진 가계, 범죄를 감싸고 도는 간교한 흉계가 아니다. 차라리 우리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것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거나 영화에서 드러내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미국적 삶의 가려진 얼굴이 별안간 고개를 쳐들 때다. 21세기에 사슴과 다람쥐를 먹는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미국의 직면한 문제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묘사는 리가 4만달러의 포상금을 벌기 위해 군대 징병관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뇌리에 오래 남는 것은 오로지 포상금을 타기 위해 지원했다는 리의 마음을 되돌리는 징병관의 대사이다. 진심으로 열일곱살 소녀의 암담한 미래에 연민을 느낀 그는 “집을 지키는 것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타이른다. 10대 핏덩이들을 전쟁터로 인도하는 파수꾼에게 당최 어울리지 않는 그이의 충언은 모질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서 흡사 성자의 말처럼 들린다. 미국의 군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가난에 찌든 시골 마을은 전략적 모병 지역이었는데, 빈궁한 시골 청년들에게 군대는 손쉬운 고용의 한 방식이었다. 영화 도입부에 동생 소니와 애슐리를 학교에 데려다준 뒤 학교 강당에서 군사 훈련을 받는 또래 친구들을 본 리는 모병 광고에 제 이름을 적어넣는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음성적으로 퍼진 마약 카르텔을 관장하는 우두머리 썸 밀튼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 출신이다. 베트남전과 중동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잇따라 치른 전쟁의 연대기 속에서 산간 외지 마을들의 평화는 덩달아 파괴되었다. 산골 청년들은 가족들이 먹고살 돈줄이 된다는 이유로 자원해서 전쟁터로 나간다. 우리는 여기서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 동력의 메커니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제공된 병력의 뿌리와 급작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군대와 범죄의 공모를 은연중에 암시함으로써 시골 스릴러는 전원의 평화를 파괴하며 위태롭게 서 있는 제국의 형상을 그리는 사회드라마로 거듭난다.

도시보다 시골에서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는 공동체의 윤리는 <윈터스 본>의 배경이 되는 오자크 지역을 지배한다. 공동체주의의 특징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관습법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웃집 아주머니는 풍족하게 먹일 식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리의 말을 돌보기로 결정하며, 나중에는 그녀의 집에 사슴 고기도 가져다준다. 삼촌 티어드롭은 혈육이라는 이유로 서슬 퍼런 위협 속에서도 리 일가족의 보호자가 된다.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과장법의 반대편에서 비인간적인 스펙터클을 선택하는 대신 <윈터스 본>은 모든 인물들을 진실에 가까운, 모순적인 인간으로 다룬다. 데브라 그래닉의 배우 활용술에는 네오리얼리즘적 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데, 경험이 일천한 신인배우(제니퍼 로렌스)와 연륜이 깊은 경력자들(존 호키스와 셰릴 리), 그리고 연기 경력이 전무한 비전문배우들을 혼용하는 방식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최고 주석가였던 앙드레 바쟁이 지적한 대로 이같은 배우의 조성은 직업배우인가 비직업배우인가가 아니라 직업배우와 비직업배우를 요령없이 섞음으로써 경계를 없애는 것에 핵심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들은 단일한 특성으로 환원되는 일면적 캐릭터가 아니라 흥미로운 복합성을 표현한다. 이를테면 상황에 대처하는 리의 방식을 보자. 리는 다질적인 요소를 한몸에 지닌 인물로 매 순간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이 자제되고 있다. 그의 연기는 말뿐 아니라 외모와 미묘한 신체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쓰러져가는 판잣집들을 전전하며 사라진 아버지를 찾는 동안 리는 조용하지만 차디찬 위협 속에서도 한 마리 암사자처럼 용맹하다. 삶을 가치있도록 만드는 것에 대한 추구와 몰인정한 세상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으려는 리의 불굴의 용기에 누구라도 진심어린 격려와 응원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내외의 평자들로부터 가열한 찬사가 쏟아졌던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는 발군이다. 가난과 학대, 고초를 꿋꿋이 견디며 결손의 상태로 물러서지 않는 리를 연기하는 그녀는 흡사 젊은 조디 포스터를 연상시킨다. 영화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스스로를 돕고자 노력하는 리와 같은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매력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복합성을 지닌 캐릭터의 매력

리의 주변 인물 또한 이런 복합성을 나누고 있다. 그들은 리의 친척들이며, 대개는 극악하고 더러 온화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유를 묻지 않고 말을 거둬주는 이웃집 여인, 친구의 곤경을 외면하지 않는 가일, 코카인에 코를 처박고 킁킁댈지언정 핏줄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티어드롭, 포악하게 물잔을 끼얹고 으르렁대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면을 주선하는 무시무시한 메랍(데일 디키)도 있다. 쓰레기 더미가 가득한 벌판, 원한과 증오가 사무치는 마른 얼굴들, 호의적인 이웃, 적대적인 관계, 어린 동생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생존의 기술을 오가며 <윈터스 본>은 다층적 캐릭터가 지닌 매력을 유려하게 스케치한다. 부서질 듯한 판잣집의 더러운 내부와 용도폐기된 채 버려진 자동차들, 녹슨 고철, 흩날리는 빨래, 마른 나뭇가지, 타버린 오두막 등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는 이미지들이 곳곳에 널브러진다.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티와 인상적인 표현주의를 함께 구사하는 마이클 맥도나그의 촬영은 카메라에 담기는 사소한 것들까지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짓물러 터진 상처난 삶의 한 귀퉁이에서 <윈터스 본>은 비밀과 거짓말로 협상을 벌이려는 자들에 맞선 한 소녀의 투쟁을 묵묵히 지켜본다. 아버지의 실종을 둘러싸고 두텁게 깔린 미스터리는 실상 리의 가족사만큼 흥미롭지 않다. 이토록 냉담한 어조로 일관하는 이야기가 종래에는 데일 듯 뜨거운 감정의 격랑을 유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윈터스 본>은 데브라 그래닉의 두 번째 작품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예술가 타입의 많은 인디 감독들이 깨닫지 못한 것을 내면화한 실력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걸작이다. 장르의 요소를 적절히 배치해 드라마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삶의 이치를 깨치는 예술의 표본을 <윈터스 본>은 보여준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프로그래머. 재는 것 없이 원껏 써보라는 <씨네21> 편집진의 주문을 따라볼 생각이다. 한편의 영화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보다 좁은 주제로 깊게 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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