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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안개가 걷히고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나

형상을 에둘러 그린 성정의 영화 <만추>가 남긴 미지근한 잔상들

김태용의 <만추>에 대한 조금은 이상한 느낌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영화를 두번 보고나서도 여전히 이 영화의 결이 잡히지 않는다. 보는 동안,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 막연한 잔상으로 이 영화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온당한가, 망설여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씨네21>에 실린 <만추>에 대한 별점을 보며 필자들의 20자평에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들이 그 결과로 준 별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그 간극에 이 영화에 대한 나의 현재 상태가 있을 것이다. 두 배우와 영화 속 사랑에 대한 논평들이 작품성에 대한 고른 지지의 별점으로 이행할 때, 둘 사이에 어떤 비평의 계단이 그걸 가능하게 하는지가 궁금하다. 여러 비평문들을 읽어보았지만, 거의 비슷한 이야기들(배우의 얼굴, 시애틀의 안개 등), 달리 말해 영화가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보라고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감흥 이외의 것들을 통해 영화를 옹호하는 평은 찾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영화에 대한 확신에 찬 판단을 전제하거나 그 확신을 풀어내는 비평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영화를 완전히 끌어안지도, 완전히 버리지도 못하겠는 지금의 내 마음을, 혹은 그 마음의 근원을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써볼 요량이다.

시나리오로만 알고 있는 이만희의 <만추> 혹은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이나 김수용의 <만추>를 김태용의 <만추>와 비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원작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존재할 수만은 없는 리메이크작의 운명, 딱 그 정도만큼만 기존의 작품들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기본 뼈대를 제외하고 과거의 리메이크작들을 본 뒤 잊기 어려웠던 유일한 공통점은,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이물감이다. 이 영화들의 물질성 혹은 촉각성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그건 단지 여기에 남녀의 지독한 육체적 욕망이 꿈틀댄다는 사실에 국한된 인상만은 아니다. 등장인물들 각각에 대한, 그리고 두 남녀 사이에 느껴지는 밀착의 강도와 관련된 인상, 말하자면, 제한된 시공간의 한계 속에 꾹꾹 눌러 담겨지다 결국 해결되지 못하고 넘쳐 맴도는 과잉된 정념과도 관련된 문제다. 그러나 김태용의 <만추>에는 위의 불편하고 지독한 정념들이 부재한다. 부족한 게 아니라, 부재한다는 게 나의 인상이므로, 이것은 차라리 영화의 의도로 보는 게 적당하다.

원작의 이물감이 배제된 리메이크작 <만추>

사실, 배경을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옮겨올 때, 중국계 미국인인 애나(탕웨이)는 이방인 죄수고, 훈(현빈)은 이방인 접대부다. 글로벌한 설정에 의해 둘은 백인 중심 사회에서 이중으로 타자화된 위상을 갖게 된다. 애나의 가족들이 경제적으로는 미국에 어느 정도 안착한 중산층처럼 보이고, 훈이 상류층 한국 여인들에게 빌붙어 연명하며 경제적으로 딱히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둘은 인종적으로, 사회적 위상으로 어쨌든 미국사회의 주변부에 존재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 글로벌한 테두리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만추> 리메이크작들을 넘어서는 이야기의 이물감을 자아내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두 남녀뿐만 아니라 인물들과 그들이 놓인 장소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떤 충돌과 균열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태용의 <만추>는 매끄럽다. 그건 우선 두 남녀의 밀착도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인상에 기반하지만, 그들의 육체가 성적으로 거칠게 부딪치지 않았다고 그렇게 느낀 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의 그 순간만큼은 유일무이해 보였던 전작들에 비한다면 애나와 훈은 충분히 서로를 보고 있지 않는다. 이미 설정부터가 그렇다. 훈은 아예 직업적으로 여자들을 상대하는 남자고, 애나는 여전히 마음에 품고 내려두지 못하는 다른 남자가 있다. 이 둘을 보다보면 둘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각자의 이야기들이 이들의 어딘가에서 마치 따로따로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애나와 훈의 감정을 보여주는 얼굴 클로즈업이 많지만, 이들의 시선이 인상적일 때는 서로의 눈이 아닌, 틈틈이 다른 곳 혹은 자기 자신을 보는 순간이다. 요컨대 훈이 거울 앞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애나가 환상을 완전히 제거한 초라한 형상으로 거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장면이 그렇다.

어쨌든 이 영화를 보며 느낀 일종의 (개인적인) 분열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러하다. 이 영화가 애나와 훈의 사랑보다는 애나에게 무게를 기울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종종 애나가 부여잡거나 들키는 그녀의 내면은 이해가 가는데, 결과적으로 그 내면의 파장에 근원이 되는 훈과의 찰나에는 마음이 그다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는 감정적인 것 같은데, 도무지 손을 뻗어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간극을 두고 연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방향이 아니라, 영화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이미 우리가 시작과 끝을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영화적 공기가 중요할 때, 그 공기를 잡아내기 위한 김태용의 선택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

이 영화에서 시애틀은 약간의 글로벌한 관심을 가진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이라면 지난 리메이크작들에서 속초 바다나 서울역의 풍경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그곳이 시애틀임을 금세 알 수 있게 찍혔다. 김태용은 인터뷰에서 시애틀을 영화의 “제3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서 잠깐 말했듯이, 시애틀이라는 특정 장소와 두 인물들 사이에는, 그것이 향수든 회한이든 낯섦이든 긴장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이곳이 애나가 한때 행복했던 시절을 보냈고, 추억이 깃든 놀이공원이 위치한 곳이라고 알려주지만, 솔직히 이곳은 안개만 낀다면 미국 어디라도 상관없을 공간처럼 보인다. 한 장소가 누군가의 고향이거나 도피처일 때의 정서, 이를테면 인물을 한없이 끌어당기거나 한없이 밀쳐내는 장소 자체의 호흡이 없다. 그걸 시애틀 고유의 안개가 해내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하며 그건 뒤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여행자에게만 가능한 사랑, 완전히 낯선 시공간이 인간에게 안기는 자극에서 비롯된 절절한 멜로의 목록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기 몸의 일부처럼, 존재와 분리할 수 없는 기억과 일상의 장소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의 목록 또한 알고 있다. <만추>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떠돈다. 그건 애나와 훈이 충분히 관광객처럼도, 충분히 현지인처럼도 찍히지 않았다는 의미며, 그게 어떤 독특한 제3의 느낌을 자아낸다기보다는 장소의 얼굴은 있는데, 거기 새겨진 주름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지난 리메이크작들이 두 남녀의 상황과 행위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한국 근대의 풍경으로 확장된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이야기의 토대가 되는 물적 조건, 글로벌의 풍경을 둘의 형상 속으로 개인화하고 축소시키는 것 같다. 애나와 훈이 어색한 영어로 대화하고, 이들 주변을 외국인들이 스쳐 지나간다는 점 등을 제외하고는 딱히 미국은 이국적 풍광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 후반, 훈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자가 훈에게 누명을 씌우는 무시무시한 장면은 실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상류층 백인 남자, (아마도 백인들의 주류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바람난 동양인 여자, 그리고 자신의 성적 매력을 자본으로 생존하는 젊은 동양인 남자. 상투적인 설정이기는 해도, 평면적이던 이야기에 조금 과장되게 말해, 정치·경제적 층이 생길 수도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장면을 마치 소설 속의 어떤 인물이 극적 효과를 위해 튀어나온 것처럼 이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 우습게 보이게끔 허구적인 기운으로 찍었다.

기차를 버리고 날씨를 택한 김태용의 결정

장소의 물질성이 부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영화에서 두 남녀가 공간을 어떻게 이동하는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만희, 김수용의 <만추>,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은 기차의 영화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기차는 이 영화들의 육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장소와 장소를 잇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장소다. 연결되고 열려 있으나 곳곳에 그만큼의 고립과 비밀을 품을 공간을 마련해둔 곳. 이 이동하는 기계 안에서는 존재의 이야기 또한 마음만 먹으면 이동할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 감옥 문을 나서자마자 기차의 공기로 사회의 공기를 맡는 여죄수들은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죽음을 결심하거나, 남자를 훔쳐보거나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며 감옥의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욕망을 끄집어낸다. 한번 지나가면 후진해서 돌아갈 수 없는, 오직 지나감만 있는 열차의 일회적인 순간은 그래서 영화에서 거의 언제나 절대적이다. 이 영화들에서 기차는 속도와 시간이 절묘하게 얽힌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리듬의 장소다. 그런데 김태용의 <만추>에서 애나와 훈이 타는 건 버스다. 물론 미국에서는 기차보다는 자동차, 비행기, 그리고 버스가 훨씬 더 애용되는 교통수단이기는 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이동경로인 캘리포니아 중남부 프레스노에서 시애틀까지 가는 방법으로 기차노선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기차가 아닌 버스, 극적인 이야기의 층위가 아닌 그저 심심한 이동수단. 무드가 곧 사건과 다름없는 <만추>에서 무드를 발산하는 핵으로서 기차는 감독에게 포기하기 쉬운 수단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니 이것이 제작조건상의 선택일지라도, 어쨌든 영화가 기차를 버렸다는 건 영화가 <만추>의 그 무드를 기차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진행시키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물질적인 육화가 아닌 거리두기와 망설임

그때 김태용의 선택은 계절, 아니, 날씨다. 물론 지난 작품들에서도 분명 늦가을이 주는 정념이 있다. 푸른 여름을 배경으로 삼은 ‘만추’를 상상할 수는 없다. 김태용 역시 시애틀의 초겨울 안개와 부슬비의 정취에 기댄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긴다. 영화가 계절 혹은 날씨에 의존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영화는 날씨에, 혹은 날씨는 영화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 그건 영화의 운명적 조건 같은 것인가, 아니면 정반대로 일종의 반칙인가. 우리는 둘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당장 떠오르는 영화들의 몇 가지 예가 있다. <만추>처럼 제목부터 계절을 지칭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에서 오즈는 계절의 풍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혹은 계절은 인물의 심리를 매개하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딸의 마음에서, 보내야 하는 자와 떠나야 하는 자에게서 계절의 마음, 설명하기 어려운 그 추상을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본다. 오즈의 예가 적절하지 않다면, <옥희의 영화>에서 홍상수의 눈은 어떤가. 그가 “날씨는 감정”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날씨의 상징성, 상투성에 기댄다는 뜻이 아님을 알고 있다. 눈이 오지 않았다면 그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성립되지 않았겠지만, 그 눈은 자체로는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날씨의 뉘앙스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홍상수 영화에서의 날씨다. 그건 서사의 (빈약한) 정서를 고양시켜주는 날씨의 기능과 완전히 다른 것인데, 이를테면 박찬옥의 <파주>를 비판하는 자들의 논지 중 하나가 그와 관련이 있었다. 삶의 모호함과 서사의 모호함과 안개의 모호함이 너무 쉽게 서로를 용인하며 수용되었던 건 아닌가, 와 같은 논지들.

그렇다면 김태용의 <만추>를 시종일관 적시는 안개는 어느 쪽일까. 그는 이 영화에 대해 “대사의 전과 후, 사건의 전과 후 등 영화적으로 볼 때는 죽어 있는 시간에 핵심이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만추>에서 그 죽어 있는 시간의 영화적 물질성을 구현하는 일은 가장 중요해 보인다. 김태용은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는다. 애나의 무표정한 시선과 도시에 무겁게 내려앉은 시애틀의 안개를 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여기에 어떤 인공적인 개입도 없다는 듯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기대하는 안개의 정조와 그만큼 예상 가능한 여인의 상처 입은 시선을 겹쳐둔다. 그때, 그 인상은 탕웨이라는 아름다운 배우의 연기와 시애틀의 안개를 빼고 나면 이 영화에 무엇이 여전히 남아 꿈틀거릴까, 라는 다소 억지일지도 모를 질문과 가까운 자리에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질문을 김태용의 <만추>는 얼굴과 풍경의 전시성에 몰두하고 있는 영화, 라는 단정으로 쉽게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다. 탕웨이의 몸, 그녀의 시선이 안개 속에서 아주 작은 차이로 보이는 변화와 그 얼굴의 미약한 이야기의 매혹을, 그것이 환영이고 착각이라 해도 아직은 쉽게 거두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에 던지는 그녀의 시선이 아니라 관객의 시각적 동요, 우리의 시선을 위해 거기 준비된 시선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떠나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함께 요동치는 방식은 김태용의 것이 아니므로 그걸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안개와 무표정한 시선이 아니라면, 가능한 어색하고 우회적인 언어와 상황으로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애나는 무대의 무용수를 빌려, 혹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남자 앞에서, 혹은 장례식장의 이상하게 코믹한 상황에서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폭발한다. 그건 자신이 상황의 주인이 아닐 때에만, 그것도 진짜가 아닌 듯한 연기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비로소 스스로를 표현하는 자의 모습이다. 김태용의 <만추>는 애초 물질적인 육화가 아니라 거리두고 망설이며 형상을 에둘러 그려가는 성정의 영화다. 이 멜로는 어떻게든 인물과 장소로 들어가 그 속의 두터움을 헤매는 길보다 그들이 스크린 표면으로 나오는 순간을 기다려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엔딩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표면들에서 정말 우리는 무언가를 포착한 걸까. 순간의 충만이 필연적이어야 할 짧은 이틀의 이야기가 매 순간, 미래로 밀려가면서 그저 카메라의 시간을 견디는 것처럼 보일 때, 정작 지나온 과거와 현재는 비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인물들이 인생을 꿋꿋이 나아가도 여전히 어딘가에 웅덩이처럼 팼을 지난 장면의 조각들, 보는 이를 쓰러뜨리고 마는 돌기들을 나는 이 영화에서 결국 찾지 못했다. 여기, 때때로 애처로움은 깃드나 비통함은 없다.

남다은 다소 산만하게 쓰고 보니 이미 결론은 내 안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스크린 안의 초겨울 안개에 젖고 나니, 스크린 밖에는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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