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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모든 서부영화에 대한 리메이크

수정주의 웨스턴과 고전 웨스턴의 접속구 <더 브레이브>

<더 브레이브>는 시대착오적인 듯한 느낌을 준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웨스턴 대부분이 수정주의 웨스턴의 길을 걷는 이 시대에, <더 브레이브>는 이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수정주의 웨스턴의 서부에서 시작해서 고전 웨스턴의 서부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코언 형제는 이러한 시대착오성을 감추기보다는 그것이야말로 자신들이 <더 브레이브>를 연출한 이유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면에서 <더 브레이브>는 고전 웨스턴뿐만 아니라, 수정주의 웨스턴마저도 수정하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이는 <더 브레이브>가 <진정한 용기>(헨리 해서웨이, 1969)의 리메이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전의 모든 서부영화에 대한 리메이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더 브레이브>는 고전 웨스턴 특유의 신화적 장식이 제거된 수정주의 웨스턴의 서부를 배경으로 고전 웨스턴에나 어울릴 만한 영웅적 인물을 재발견하려 한다. 물론 그것이 코언 형제가 고전 웨스턴 특유의 신화적 인물을 그대로 따른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더 브레이브>의 특이성은, 영웅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수정주의 웨스턴의 서부에서, 신화적 인물의 도움 없이도 고전 웨스턴의 영웅성을 되살려낸다는 점에 있다.

던진다는 것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노년의 랜섬 스타(제임스 스튜어트)는 탐 도니폰(존 웨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서부에 도착한다. 존 포드에게 그 장례식은 단지 한 인물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닌, 고전 웨스턴(그리고 그 세계를 주름잡던 서부의 영웅)의 죽음에 대한 애도였을 것이다. 랜섬 스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역마차’가 대륙을 횡단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역마차와 기차, 그것은 서부의 역사를 가르는 기호다. <더 브레이브> 역시 기차와 함께 매티(헤일리 스타인펠드)를 등장시킨다(매티가 기차 안에서 서부의 풍경을 바라볼 때, 차창에 투영된 서부의 모습은 스크린의 투사를 통해 구축된 서부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듯하다). 그녀가 서부에 발을 내디딘 이후, 법을 앞세우는 그녀의 논리가 꽤 잘 먹혀든다는 점은 또 다른 사실을 상기시킨다. 법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 서부에서 고전적 영웅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수정주의 웨스턴의 존립 근거라는 것 말이다.

우리는 <더 브레이브>의 교훈담이 고전적 영웅의 시기가 아닌, (<와일드 번치>의 비숍(윌리엄 홀뎀)이 말처럼) ‘총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서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스터 카그번(제프 브리지스)이 수정주의 웨스턴의 전형적인 인물에 가깝다면, 매티 앞에서 자신이 텍사스 레인저임을 은근히 뽐내는 라뷔프(맷 데이먼)는 고전적 영웅을 흉내내는 시대착오적 인물에 가깝다. 물론 둘의 공통점은, 서부의 세계에서 잉여적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수정주의 웨스턴에 등장하는 이러한 인물들은 자신의 잉여성과 마주하며 몰락과 종말의 서사로 영화를 이끌고 가곤 했다. 하지만 코언 형제는 볼품없고 불필요한 존재로 낙인찍힌 인물들, 대의가 아닌 돈을 위해 총을 드는 수정주의 웨스턴의 인물들에게서 고전적 영웅성을 발견하면서 고전 웨스턴의 신화적 세계뿐만 아니라, 수정주의 웨스턴마저도 수정하려 한다(만약 고전 웨스턴의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면 그저 그런 교훈담에 머물지 않았을까).

고전 웨스턴은 무법의 세계를 법의 울타리로 둘러치는 과정에서 서부의 영웅을 발견하고 그들을 신화화했지만, 법의 세계에서 잉여 존재로 남겨진 그들에게서 영웅성을 발견해야 하는 <더 브레이브>는 그들을 무법의 세계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 그들의 영웅성은 법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에서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더 브레이브>에서 흥미로운 것은 법과 무법의 이질적 세계, 또는 수정주의 웨스턴의 인물(세계)과 존 포드가 구축했던 고전 웨스턴에 어울릴 만한 인물(세계)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채니를 찾아 모험을 떠나겠다는 매티의 편지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들려올 때, 화면에는 옷을 갖춰 입는 매티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치기어린 내레이션과 달리 매티와 복장의 부조화는 그녀가 무법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런 매티가 루스터를 쫓아 강가에 도착했을 때, 법과 무법의 이질적 세계를 연결하는 접속구처럼 등장한 ‘던지는 행위’이다. 매티가 자신을 돌려보내려는 남자의 머리에 사과를 던지는 장면 말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뜬금없이 존 포드가 떠올랐다. 아니, 존 포드에 대해 이야기했던 하스미 시게히코가 떠올랐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존 포드의 영화에서 다양한 함의로서 등장하는 ‘던진다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중 하나가 시퀀스(또는 신)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내러티브 구조가 기반하는 것으로서의 던지는 행위였다. 매티의 던지는 행위 역시 이질적인 두 세계의 접속구로서 등장한다. 더이상 법의 논리가 통용될 수 없는 무법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징표로서의 ‘던진다는 것’, 수정주의 웨스턴의 세계에서 (영웅성이 드러날 수 있는) 고전 웨스턴의 세계로 전환하는 길목에서 ‘던진다는 것’, 물론 이는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하지만 기막힌 우연이다.

기억한다는 것

<더 브레이브>가 소녀 시절의 매티에서 중년 여성의 매티로 비약할 때,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루스터가 서부극 서커스단의 일원이 되어 자신의 무용담에 의존하며 살았으리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매티가 법이 금지하는 사적 복수의 대가로 한쪽 팔을 내놓아야 했듯이, 루스터의 삶 역시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였을 것이다. 회상의 시점으로 돌아온 코언 형제의 시선은 무척이나 냉정하고, 그 속에 그들이 <더 브레이브>를 연출한 이유와 현실 인식이 묻어난다.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영웅이 사라진 수정주의 웨스턴의 세계에 가깝다. 루스터는 별이 총총히 박혀 있는 늦은 밤, 한 소녀를 살리기 위해 숨이 넘어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던 이야기를 무용담으로 펼쳐놓았을까? 아마도 관객이 소비하고자 했던 것은 홀로 네명과 맞섰던 신화적인 영웅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언 형제는 우리의 기억이 맞닿아야 할 지점에 표식을 남겨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겨울의 스산함이 가득한 황야의 풍경이 펼쳐지는 꽤 서정적이면서도 쓸쓸한 일련의 장면 끝에서, 루스터는 “돌아갈 때를 위한 표시”라며 나뭇가지에 빈 병을 걸어둔다. 이때 화면의 중심에서 관객의 시선을 끄는 것은 매티와 라뷔프가 아닌 나뭇가지에 걸린 빈 위스키 병이다. 어쩌면 그 빈 병은 루스터와 그 일행을 위한 것이 아닌 관객을 위한 표식일 것이다. 관객이 기억해야 하는 서부, 혹은 관객이 되돌아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영웅적 삶의 표식. 물론 <더 브레이브>가 기억하자고 제안하는 서부는 신화적 영웅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고전 웨스턴의 영웅을 이야기하면서도, 고전 웨스턴에 대한 낭만적 향수로 가득한 영화로 완성되지 않은 이유다. <더 브레이브>는 (실제)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해 (상징적)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맺는다. 그러니까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아버지의 자리를 비워놓고, 그 자리를 채울 새로운 아버지가 그 자리를 채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더 브레이브>는 기억에서 거부당했던 아버지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영화다. 그 아버지는 역사의 진보를 약속하는 목적론적 거대 서사를 떠받치기 위한 신화적 영웅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 속에 가려 있던, 죽어가는 딸을 살려야 한다는 순정의 마음 하나만으로 달리고 또 달리는 아버지다. 루스터를 통해 코언 형제가 남겨놓은 표식은 숨을 거칠게 헐떡이던 아버지와 그 소박한 진심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매티가 루스터를 회상하는 이유이고, 그에게 제대로 된 무덤(상징적 자리)을 선사한 엔딩의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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