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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인간의 윤리를 묻다

<애니멀 타운>이 드러내는, 우리가 사는 도시의 실체

<애니멀 타운>

<애니멀 타운>은 아동성범죄 전과자와 그를 뒤쫓는 인쇄소 사장의 일상을 교차하여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둘의 관계와 진실을 드러낸다. 켜켜이 쌓여가던 긴장은 후반부에 이르러 폭발하며, 우리가 사는 도시의 끔찍한 실재가 드러난다.

아동기호증자, 불쌍하고도 위험한 존재

아동성범죄자로 얼마 전 출소한 오성철은 공사장에서 임금을 떼이고, 난방과 수도가 끊긴 철거 직전 아파트에 산다. 전자발찌를 차고,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성욕을 점검받고 약을 먹는다. 공사장 십장, 아파트 관리자, 의사, 경찰 앞에서 그는 주눅 든 아이처럼 고분고분하다. 의사는 자위를 하라고 말하고, 경찰은 집에 들이닥쳐 이것저것 열어보고 발찌 착용을 확인한다. “어디서 뭐하는지 다 안다”는 엄포를 듣는 그는 생체권력의 감시대상자이고, 착취당하는 하층노동자이며, 도시 바깥으로 내몰리는 철거민이다. 누나는 그에게 돈과 옷을 주지만, 집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누나 앞의 그도 온순한 동생 같다. 초반의 성매매 여성과의 섹스장면이 없었다면, 영화의 4분의 3 지점까지 그는 거세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섹스를 하다 여자가 “힘들면 내가 할게”라고 말하자 그는 입을 막고 밀친다. 여성이 적극성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영화는 아동기호증자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준다. 그들은 성욕이 넘치거나, 성적 자신감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다. 자아상이 매우 낮으며 성인과의 대등한 성관계를 즐기지 못한다. 그들은 (남성)사회질서의 약자들이지만, 젠더와 섹슈얼리티 관계에서 그 억압을 보상받으려 한다. 그러나 성인여자와의 성관계는 이를 보상해주지 못하고 때로 열패감을 더 자극한다. 그러나 아동과의 성관계에서는 완전한 우위가 보장된다. 이것이 아동기호 판타지의 핵심이다.

아동성범죄를 비롯한 성범죄는 사회경제적 억압이 젠더와 섹슈얼리티라는 약한 고리를 통해 분출되는 사건이다. 영화 속 가장 강렬한 장면인 택시 승객과의 싸움 역시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 오성철은 처음 승객에게 (사회경제적 약자답게) 고분고분 대하며, 택시비를 물어주겠다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돈 때문에 화를 내는 ‘천한’ 자가 아니라 시간 때문에 화를 내는 ‘귀한’ 자로 인식되길 바라며 더 화를 낸다. 그녀가 “씨발, 개새끼”라고 욕하자, 그도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으며 여자를 마구 때린다. 얼굴이 피범벅된 여자의 아랫도리를 홀딱 벗겨 길바닥에 눕혀놓고, 그는 주민등록증을 까보며 신고하지 말라 협박한다. 이 장면은 강간이 아니지만, 강간 이상으로 성적인 임팩트가 강하다. 가까스로 억압되던 그의 욕망이 택시 승객으로 인해 터지자, 그 틈으로 다시금 아동기호증이 머리를 내민다. 몸에 묻은 피를 씻으러 간 학교 운동장에서 소녀를 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간다. 뒤따라온 경비에게 흑흑 울며 오줌을 누던 그가 “아저씨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급해서요”라고 사정할 때, 그의 아동기호 욕망은 참을 수 없는 요의와 마찬가지로 생리적인 욕구로 치환된다. 영화에는 수도가 끊겨 학교 수돗물을 페트병에 받아다 쓰는 그가 알몸으로 씻는 장면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영화는 자기 몸을 불결하게 여기면서도 욕망을 어찌하지 못하는 그를 불쌍하게 그리면서도, 여전히 그가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잠재성의 시간에서 현실성의 시간으로

영화 초반에 오성철이 파지 줍는 소녀를 눈여겨볼 때, 그의 전과를 아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눈길은 위험하게 느껴진다. 유리 파편으로 피 흘리는 소녀에게 (이미 자살을 결심한) 그가 택시에서 내려 다가앉을 때, 그것은 욕정일 수도 있고 연민일 수도 있다. 욕정인지 연민인지는 그 순간 오성철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때 이를 보던 인쇄소 사장이 택시에 오른다. 복수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소녀에게 접근하는 걸 막으려는 순간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소녀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니,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져서’라고 이해하더라도, 여기서 사적 보복의 감정과 공적 보호의 감정 중 무엇이 앞서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다. 우연히 공사장에서 발견한 오성철을 집까지 미행하였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복수는 언제 결심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무감정(Apathic)한 상태로 인쇄소 사장이자 교회 집사로 일상을 영위하던 그에게 약간의 감정적 동요가 이는 것이 감지될 뿐이다. 안 피우던 담배를 피우고, 장로가 준 생선을 버리고, 치킨집 여자의 가슴에 성욕을 느껴 성매매업소를 찾고, 일하던 칼을 무심코 주머니에 넣고, 성경을 쥐고 엉엉 우는 것을 카메라가 비출 뿐 주관적 감정묘사나 설명은 생략된다. 그가 오성철의 택시에서 주머니 속 칼을 만지다 손을 베일 때나, 택시에서 내린 뒤 다시금 오성철을 뒤쫓아와서 목을 매는 것을 볼 때 정확히 그의 감정이 무엇인지 규정되지 않는다. 그는 한참을 무표정하게 보다가 줄에 매달려 버둥대는 오성철의 목을 힘껏 조른다. 그러고는 “이렇게 죽으면 편안할 것 같았어? 이 짐승 같은 새끼야”라며 칼로 줄을 끊는다. 복수를 위해 휴대하던 칼로 자살을 막은 그의 행위는 ‘연민’일 수도 있고, ‘더한 복수’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곧이어 나타난 멧돼지로 인한 오성철의 최후는 신의 ‘처벌’일 수도 있고, (죽지도 못한 이에 대한) ‘자비’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멧돼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다. 이는 여러 차례 뉴스로 복선이 깔렸을 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멧돼지는 주제를 정확히 대변하는 필연적 상관물이다.

<애니멀 타운>에서 감정은 매 순간 혼재되어 있고, 유동적이다. 오직 사건을 통해 그 순간의 감정이 사후적으로 의미를 가지며 고정된다. 처음엔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지만 불과 몇분 만에 엄청난 폭력으로 전화된 택시 안 혈투에서 보듯이, 어떤 의미로 고정되지 않은 잠재된 감정과 에너지의 흐름이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 촉발되어 현실적인 것으로 화한다. 오성철에게 흐르는 잠재성의 시간들(가령 임금을 떼었고, 파지 소녀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과 택시 승객의 잠재성의 시간(아마도 유흥업소 종사자로 보이는 그녀가 천시당했다든지 하는)이 맞닥뜨리는 순간, 가까스로 봉합되어 굴러가던 상징질서의 틈이 벌어지면서 엄청난 실재의 폭력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테헤란로의 멧돼지’는 이러한 실재의 출현을 상징하는 물(Thing)이다. 택시 승객과 오성철은 서로가 서로에게 갑자기 틈입한 멧돼지이며, 인쇄소 사장에겐 오성철이 멧돼지이고, 파지 소녀에겐 가게 주인이 멧돼지이다.

‘애니멀 타운’에 사는 ‘인간’의 윤리

거대한 폭력의 잠재성이 도시 밑바닥을 흐르며, 서로가 서로에게 멧돼지로 출몰할 ‘사건의 순간’들이 매초마다 지나간다. 국가와 사회는 열심히 위험을 관리하는 듯하지만, 관리는 형식적이며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오성철을 찾아온 경찰들은 발찌를 확인하고 난방을 하라 말하지만, 왜 난방을 할 수 없는지, 임금은 받았는지, 밧줄은 뭔지 묻지 않는다. 그 결과 ‘아동성범죄는 아닌’ 사고가 터진다. 소녀를 방문한 사회복지사는 쌀과 돈을 전하며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지만, 왜 학교를 가지 않는지 묻지 않는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녀의 서울대 입학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해질 뿐, 집사인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신앙은 기복적이며,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피상적인 관계에 둘러싸인 그는 혼자 울 수밖에 없다. 철거 직전 건물에는 가출청소년들이 방치돼 있고, 하루에 수십명의 사람들과 밀폐된 공간에서 만나는 택시 기사 일은 저임금 일자리일 뿐 어떠한 관리도 받지 않는다. 관리되지 않은 위험은 도시 속에서 무수한 선들로 연결되며, 누구도 위험과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쇄소 사장은 그의 오토바이를 훔친 소년의 사고사에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자식 잃은 부모의 입장에서 묻는다. “죽은 애는 몇살인가요?” 그는 오성철의 목줄을 끊고, 자기 책임을 짊어지기 위해 소년을 문상한다. 죽은 딸과 아내의 환영과 여전히 함께 사는 그는, 딸에게 해열제를 먹이라는 아내의 목소리를 비로소 자기 안에서 들리는 환청으로 인식하고, 자신이 약을 먹는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딸과 아내의 ‘부재’가 들어온다. 그는 ‘멧돼지’를 끌어안음으로써 환영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바로 <애니멀 타운>이 제시하는 유일한 구원의 해법이자 ‘애니멀 타운’에 사는 ‘인간’의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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