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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왜 사소한 문제에 매달리고 모호한 영화에 반할까
김혜리 2011-03-25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을 보고 어린 처녀 마리아가 품었을 불안을 다시 떠올리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수태고지>(Annunciation, 1850).

*<짐승의 끝> <웨이 백>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월4일

“곧 아들을 잉태하고 출산할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지으시오.” 아닌 밤중에 방문한 천사 가브리엘의 통보를 어린 처녀 마리아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신의 선택에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마음이 전부였을까?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묘사한 종교화를 볼 때마다 들었던 엷은 의구심을 달래준 것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그림이었다. 로제티의 좁고 길쭉한 화면에 갇힌 10대 소녀 마리아는 충격과 두려움으로 움츠려 있다. 놀라운 소식을 들고 온 대천사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벽에 몸을 밀착하고 시선을 내리깐 소녀는 무의식적인 방어 태세를 취한다.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을 본 뒤 로제티의 <수태고지>를 불가피하게 떠올렸다. 인간의 마을을 벽력처럼 엄습한 종말을, 척박한 필치로 그린 <짐승의 끝>은 처음에는 M. 나이트 샤말란풍의 (단, 매우 가난한) 스릴러로 보인다. 특히 덤덤한 일상을 삽시간에 낯선 지옥으로 둔갑시키는 첫 20분은 스릴러 도입부의 훌륭한 예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짐승의 끝>을 독특하게 만드는 요소는 감추려는 의도없이 흰 뼈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종교적 알레고리다. 야구 모자를 쓴 박해일의 형상을 한 <짐승의 끝>의 신(神)은, 야유하는 신이다.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고 약점을 후벼 판다. 연방 목소리로 교신해 오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는 손을 뻗어주지 않는다.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폐허를 헤매던 소녀 순영(이민지)은 육체적 고생과 정신적 모욕으로 바닥까지 비천해진 다음에야 천군천사의 보호는커녕 차가운 길바닥에서 몸을 푼다. 영적 이미지와 종교적 도상의 휘장을 걷어내고 나면 2천년 전 마리아의 출산 역시 이와 같은 간난신고가 아니었을까?

3월6일

아이패드2 발표 뉴스를 접하고 웹을 어슬렁거리다 애플이 자사 휴대전화와 태블릿 PC의 유일한 단추인 홈 버튼을 없애고자 한다는 소문을 뒤늦게 들었다. 스티브 잡스와 그의 디자이너들은 ‘봉제선’을 가능한 한 지우는 천의무봉의 미학에 반해 있나 보다. 하긴 돌아보면 애플 제품들은 무엇이 있느냐만큼 무엇이 없느냐가 화제였다. 본체가 따로 없다든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없다든지. 이건 도넛이나 마찬가지다. 테두리만큼이나 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구멍도 긴요한 경우다. 문외한 소비자의 눈으로 봐도 애플은 보이는 것 사이의 무형의 공간을 구부리고 연결해 예쁜 형상을 만드는 재능이 있다. 신기술 최초 탑재의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꼭 필요한 기능적 목표를 간추린 다음 최대한 세련되게 뽑아낸다. 글을 쓰거나 음식을 만들 때에도 염두에 둘 만한 요령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차 어떤 태블릿 PC를 살 것이냐 관련 게시판들이 다시 왁자하다. 오늘날 구매를 둘러싼 의사결정에는 물구나무선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 같다. 즉, 제공되는 정보와 상품의 가짓수가 많을수록 소비자가 숙고하는 시간과 노력이 늘어나는데 어느 지점을 지나면 고민에 투자된 수고의 부피가 선택 자체의 중요성을 부풀리는 거다. “이렇게 오래 망설이고 비교했으니 엄청 중대한 사안임이 분명해. 오답을 내면 큰 손해야.” 그래서 우리는 더 열렬히 궁리하고 그러는 동안 선택지는 더 많아지고…. 모르긴 해도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오류가 있으리라.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고민하다 역 앞 정류장에서 20분간 패닉에 사로잡혀 보았다면 슈퍼마켓 수세미 매대 앞에서 울상으로 얼어붙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소린지 알 거다.

3월7일

수몰된 문화를 구명하려는 임권택 감독의 오랜 노력은 작품번호 101번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도 계속된다. 전주시 공무원 필용(박중훈)은 한지 복원사업 부서로 발령을 받고 승진의 승부수를 거는데,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직무의 요구를 넘어 깊이 몰두한다. 왜? 이 대목에서 필용의 개인사와 정신적 갈증이 끌려 들어온다. 그러나 <달빛 길어올리기>에는 <춘향뎐>과 <천년학>이 보여준 주제와 형식의 유려한 종합은 없다. 천년을 견디는 한지의 품격과 나약한 인간사가 마주쳐 비범한 화음을 내는 이미지는 출몰하지만, 미학과 드라마가 영화 전반에 걸쳐 통째로 한몸이 되는 황홀경은 맛볼 수 없었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내게 어려운 영화였다. 한편의 영화가 어렵다고 말할 때는 보편적인 이유와 관객 개인의 특수한 사정이 공히 작용한다. 물리적 상영시간이 엄청나게 길다거나, 시퀀스와 시퀀스의 연결이 흐릿하고 인물 사이의 관계가 불분명한 경우가 난해한 영화의 일반적 조건에 속할 것이다. 물론 이해를 목표로 극장에 간다는 믿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해를 거절하는 영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도 존재한다. 임권택 감독님 특유의 대범한 리듬으로 펄럭펄럭 넘어가는 <달빛 길어올리기>는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해서 어려운 영화였다. 아마 내가 찾고 있던 것은 끝내 풀어낼 수 없는 비밀이 담긴, 장면과 장면 사이에 접힌 주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3월8일

오스카 후보에 네 차례 지명된 감독이라도 시장 트렌드 앞에서는 용빼는 재주가 없는가 보다. 피터 위어 감독의 <웨이 백>은 과소평가된 2003년작 <마스터 앤드 커맨더…> 이후 세개의 무산된 기획을 딛고 7년 만에 나왔다. 냉소적 정서와 작은 성취의 해부에 훨씬 우호적인 최근 영화계 경향을 고려할 때, 인간성의 신비와 잔혹한 자연의 위엄을 그리는 <웨이 백>은 고루하대도 별수 없는, 구식 영화다. 보통 영화 속 여행에서는 인물의 심리적 성장이 물리적 이동보다 중요하다는 게 정설이지만, <웨이 백>은 6500km에 달하는 여정의 가공할 길이 자체가 영화의 본질이다. 시베리아 수용소를 탈출한 7인이 바이칼 호수를 지나 몽골로, 다시 중국을 가로지르고 티베트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이르기까지 왼발을 앞으로 딛고 그 다음엔 오른발, 다시 왼발을 내딛는 시시프스적 고난의 시간. 그리고 과연 무엇이 이들을 계속 나아가게 하는가에 대한 희미한 질문, 그게 전부다. 더 큰 고통과 더 긴 고통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 정도의 자유가 허락된 장정의 끝에서 생존자들의 희망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도중에 죽어간 동료의 스케치를 책으로 내겠다고 하고 전직 신부는 교회를 포기하고 투쟁하리라 말한다. 고문당한 아내의 고발로 구금됐던 주인공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자신뿐이기에 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홀린 듯 종말까지 걷겠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천신만고 끝에 국경까지 와놓고 둘아서는 이도 있다(“자유는 내게 어울리지 않아”). <웨이 백>이 궁극적으로 기리는 것은 선이 아니라 숭고함이고, 인간 승리가 아니라 인간성의 미스터리다

<웨이 백>의 일행 중 미국인 엔지니어로 분한 에드 해리스의 대사는 모조리 절창이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가 압권이다. 내게 정의(正義)란 이를테면, 죽었다 깨어나도 나쁜 연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 배우가 더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일을 뜻한다.

3월9일

영국 왕실은 2차대전과 더불어 시대극 소재 공급처로서 영화계에 지대하게 기여해왔다(거기 비하면 일본 왕실은 뭘 하고 있단 말인가). <킹스 스피치>는 군주제 풍자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더 퀸>보다는 <미세스 브라운>의 근친이다. 한데 엘리자베스 2세의 선왕이 말을 좀 더듬었건 말건 지금 우리가 무슨 상관인가? 이 전혀 대수로워 보이지 않는 문제를 관객이 대수롭게 여기게 만들고, 급기야 연연하게까지 만드는 능력. 누군가 <킹스 스피치>의 저력을 두줄로 요약하라면 그렇게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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