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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 낳은 분열

장률의 <두만강>, 그 ‘관념성’을 옹호하다

*스포일러에서 시작하는 글입니다.

<두만강>의 쟁점에 대해서는 이미 795호에 정한석(‘마술처럼 흔들리는 취권의 순간들’)과 정성일, 허문영의 씨네산책(‘그는 경계에 서 있다’)이 상세히 밝혔다. 그들이 짚어낸 공통된 쟁점은 이 영화 속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데, 순희가 탈북자에게 겁탈당하는 장면, 그때 생긴 아이를 낙태하는 결정, 그리고 영화 말미에 창호가 스스로 몸을 던져 죽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 대한 호의를 전제로 이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한석은 장면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진행하는 방식”이 장률의 영화답지 않게 도식적이고 관념적이며 구체성을 상실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성일은 그 죽음들에 대해 영화가 희망의 가능성을 거세한 것은 아닌지 물었다. 허문영 또한 창호의 선택에 “과도한 순교의 책임”이 부과된 건 아닌지 질문하며, 영화가 아이의 죽음을 취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불편함에 대해 말했다. <두만강>은 이러한 쟁점 이외에도 충분히 말해질 만한 요소가 많은 작품이지만, 이 쟁점을 끌어안을 것인지, 의심할 것인지에 따라 영화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위의 필자들의 지적은 <두만강>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을 주제화한다는 명목하에 극적 장치로 사용하는 일련의 영화들, 이를테면 죽음 자체에 대한 개입은 없고 그것의 상징적 재현의 효과에 몰두하는 영화들 모두에 대체로 해당되는 것이다. 나 역시 영화 속 아이의 죽음은 그 어떤 죽음보다 타자화된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어떤 경로로든 형상화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 의도가 훌륭해도 일단 의심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러한 무조건적인 의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만한 순간들을 나는 <두만강>에서 마주한 것 같다. 이상하다. 위의 필자들이 언급한 일련의 장면들이 나는 껄끄럽지 않았다. 아니, 아이들의 죽음, 창호의 투신이 갑작스럽거나 어른의 세계를 위해 내던져진 관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모순된 문장처럼 들리겠지만, 그 죽음들이 그저 죽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평소와 다른 이 느낌, 당혹스럽지만 이상하게도 굳게 믿게 되는 이 느낌의 근원을 영화 안에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위의 쟁점들에 대한 위의 필자들과 반대되거나 다른 자리에서 <두만강>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보려고 한다.

소년은 “벌써 떠나가는 길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창호의 투신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돌아가야만 하는 두 지점이 있는데, 영화 전체에서 가장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순간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하나는 영화의 첫 장면이다. 한참 동안 카메라가 꽁꽁 얼어버린 두만강의 하얀 풍경을 바라본 뒤, 마을의 어른 둘이 카메라쪽으로 다가온다. 카메라가 고개를 숙이자, 한 소년이 웅크린 채 눈을 감고 누워 있다. 소년을 내려다보던 어른들이 “창호 아닌가?”라고 말하자, 갑자기 소년이 눈을 번쩍 뜨더니 강 저편으로 빠르게 도망을 친다. 영화는 그가 점처럼 사라질 때까지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본다. 창호는 거기서 무엇을 하던 중이었을까.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죽은 척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일까.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탈북한 소년들로 추정되는 시체가 언 강 위에 창호와 거의 유사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나온다. 이 두 장면은 서사상의 필요성을 넘어서는, 뭔가 이상한 기운을 품고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잊을 수 없다. 죽음을 흉내내는 소년과 실제로 죽은 소년들의 경계(두 장면 사이에는 ‘두만강’이라는 타이틀이 뜬다), 그러나 그 경계를 넘어서 결국은 공유되는 죽음의 공기. 공안이 죽은 소년들의 몸을 강 밖으로 끌어내는 광경을 멀리서 거리를 두고 찍은 두 번째 장면을 보고 나면, 죽은 듯 누워 있던 창호의 몸에 밀착했다가 그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던 첫 번째 장면이 왠지 창호의 꿈결처럼 느껴진다. 혹은 창호의 그 모호한 행위와 거기 내재된 모호한 기운은 뒤이은 탈북 소년들의 명백한 현실의 죽음과 서로를 품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혹은 창호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미 육체적으로 영화적 타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둘 사이에 어떤 반복, 혹은 교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지점은 영화의 중반 즈음, 탈북 소년 정진과 친구가 된 창호가 정진을 집으로 데려온 뒤, 함께 밥을 먹기 위해 두부를 사러 갔을 때다. 두부를 사서 돌아서는 창호를 두부를 만들어 파는 여인, 아마도 첫 장면에서 얼음 위에 누워 있던 창호를 발견했던 그 여인이 갑자기 소년을 붙잡으며 “니 죽은 게 어떻게 두부를 빌어먹니?”라고 묻는다. 창호는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없이 나가버린다. 첫 장면의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는 정황이기는 해도, 그로부터 영화가 한참 진행된 뒤,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하며 던져진 여인의 물음, 그걸 서둘러 뿌리치는 소년의 모습은 어딘지 낯설고 생경하다.

말하자면 위의 두 지점에서 창호는 스스로를 죽은 사람처럼 다루거나, 혹은 그는 죽은 사람처럼 다뤄지고 있다. 그걸 단지 아이의 제스처이거나 어른의 농담이라고 치부하기에 그 행위와 말에는 일순간 현실을 정지시키는 것 같은 정적이 감돈다. 그렇다면 이 순간들은 그저 영화 말미 창호의 죽음을 암시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인가. 장률은 인터뷰에서 사람이 죽을 때는 그전에 언제나 반드시 흔적이 있는데, 죽기 얼마 전, 창호가 창밖으로 무술 동작을 하면서 살짝 뛰어내리는 모습이 바로 그가 “벌써 떠나가는 길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멋지게 설명했다. 그런데 앞의 두 지점은 그런 흔적, 혹은 암시와는 좀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나는 그 순간들을 보며 차라리 죽음은 이미 너무 가까이 있거나, 처음부터 거기 있다는 표현을 쓰고 싶어진다. 창호가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이 느닷없거나 과도한 죽음이라고 생각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때 창호는 죽음의 위협에 당면한 탈북 소년들을 도와주는 자가 아니라, 애초에 그 소년들과 공동의 운명을 지닌 존재처럼 보인다. 물론 살아 있는 소년을 두고 이미 죽음은 거기 있다, 는 표현을 쓰는 건 그를 영화적 관념의 도구로 해석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잠시 창호와 정진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죽음, 행위 그 자체로 읽혀야 하는 까닭

창호와 친구들은 어느 날 폐교 구석에서 불을 쬐며 쉬고 있는 탈북 소년들과 마주친다. 창호 무리는 처음에는 적개심을 보이지만, 탈북 소년 중 한명인 정진이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자, 대신 다가올 축구시합에 나오라고 조건을 건다. 정진은 약속하는데, 음식을 요구하는 정진의 모습에는 구걸과는 사뭇 다른 당당함이 있다. 창호는 음식을 가져오고 정진에게 건넨다. 그때 카메라가 이 모습을 찍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카메라는 창호가 정진에게 음식을 주는 그 순간을 폐교의 창밖에서 멀리 떨어져 찍었다. 둘 사이에는 별말이 없고 창호 무리는 먹을 것을 준 뒤에 바로 그곳을 빠져나간다. 그러니까 그들은 탈북 소년들이 허기를 채우는 모습을 구경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간 뒤에야 카메라는 폐교 안으로 들어와 비로소 탈북 소년들이 먹는 모습을 그저 지켜본다. 여기에는 그 어떤 비굴함도, 동정도 없고 그저 ‘사실’만 있다. 탈북 소년들은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고, 옌볜의 소년들은 먹을 건 있는데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가진 걸 부족한 것과 교환한다. 심지어 이후, 정진이 아무도 없는 창호의 집에서 쌀을 가지고 나올 때도, 그는 그걸 당당하게 밝히고, 창호 역시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물론 탈북자들에 의한 마을의 피해가 눈에 띄게 커지면서 이 관계도 위태로워지지만, 그전까지, 그리고 영화의 엔딩에서 기본적으로 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이기 위해 애쓴다. 정진과 창호 사이에 쌀, 약속, 축구, 미사일 모형, 그리고 마침내 생명이 교환될 때, 여기엔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하지 않으려는 부단한 움직임이 있다. 정진은 불쌍한 탈북자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때 타자에 대한 환대, 와 같은 거대한 수사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이들의 국적이 다르다는 태생적 차이가 아니라, 물적 조건을 넘어서 이들의 자리바꿈이 가능해지는 순간들, 감정적인 평등함이 작동하는 순간들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정진이 탈북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 순간들은 늘 (장률의 말대로) ‘목숨을 걸고’ 일어나므로 창호와 정진의 관계에는 언제나 죽음의 기운이 어떤 형태로든 둘러싸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어른들의 현실과 다른 삶의 순수함 가운데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중심에 두고 매번 타자의 자리로 가기 때문에 영화적 활력이 나오는 것이며, 나는 그것이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미 죽음이 거기 있는데, 창호는 굳이 왜 영화의 마지막, 지붕에서 뛰어내리며 육체적으로 부서져야 했을까. 영화는 그의 죽음을 굳이 그런 식으로 명시해야 했을까. 영화가 후반에 접어들자, 탈북자의 소행으로 짐작되는 사건들로 마을이 뒤숭숭해지면서 정진에 대한 창호의 마음도 잠시 돌아선다. 옌볜의 소년들에게 구타를 당한 정진이 무슨 마음인지 창호도 없는 집에서 창호의 누나가 차려준 밥을 먹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창호가 정진에게 화풀이를 하자, 정진은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며, 이미 여동생은 죽었다고 말한다. 정진이 떠난 뒤, 누나는 그가 창호를 위해 가져온 미사일 모형을 전해준다. 정진은 우표 수집을 하는 창호를 위해 북한 우표를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구하지 못해서 대신 그만큼 귀한 모형을 가져온 것이다. 창호는 받침 부분이 부러진 미사일 모형을 아무 말도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단조로운 대사와 어딘지 결연한 행동으로 채워진 화면에는 죽음과 생존, 배신과 신뢰, 분노와 애틋함, 연민과 후회 등이 응축된 감정들이 말없이 서로를 건드리며 감동을 자아낸다. 그런 다음 화면은 눈 내리는 창가에 오롯이 세워진 정진의 미사일 모형 장면에 온전히 할애되는데, 왠지 모를 슬픔과 꿋꿋함의 정서가 동시에 스며든다. 우표가 아닌 미사일. 그러니까 편지의 오고 감이 아니라 한번 발사되면 돌아오지 못하고 어디선가 폭발해야만 하는 운명. 정진이 주고 간 미사일 모형을 보면서 창호는 이제 자신이 정진에게 되돌려줘야 할 무언가를 생각하며 다짐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밖에서는 총소리가 들리고 창호는 잠들지 못한다.

이 모든 장면들이 지나간 뒤 벌어진 창호의 투신은 그러므로 비통하기는 해도 급작스럽지 않다. 창호가 지붕에서 내려오라는 어른들의 말에 잠시 프레임 아웃될 때, 우리는 잠시 안도하지만, 창호는 추락의 도약을 위해 잠시 뒤로 빠진 거였다. 소년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어른들과 타협을 보려는 게 아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행위. 그러므로 내게 그것은 누군가를 대신한, 혹은 누구를 위해서 선택한 희생의 행위로도, 물신화된 행위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희망이나 절망의 양분화된 차원으로 규정하기도 망설여진다. 왜냐하면, 창호의 투신은 행위의 결과를 내다보며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 그 자체로서 읽혀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소년은 죽음을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의 투신은 오직 지붕 아래에서 수갑을 찬 채 지켜보고 있는 정진을 향해 있다. 그것은 창호에게 주어진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인 유일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창호의 이런 결단을 죽음이라는 단어, 영화 밖의 우리가 기껏해야 관념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단어로 고정하고 싶지 않지만, 굳이 그래야만 한다면 이 행위를 자살이 아닌, 창호의 두 번째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의 애매함을 좀더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다른 한축에서 진행되는 순희의 이야기를 따라가볼 필요가 있다.

한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엄마 대신, 창호와 할아버지를 챙기며 사는 순희는 말을 못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곱다. 장률의 다른 영화를 한편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티없는 여자의 일상에 느닷없이 불행이 침투하리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어느 날 밤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탈북자의 청을 할아버지는 거절하지 못하는데, 다음날 우리는 노인과 손자가 도시로 외출한 걸 알게 된다. 불길한 예감. 이후 영화는 예상대로 진행된다. 의연한 어린 정진과 확연히 대비될 정도로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볼 수 없게 비굴하게 호소하던 탈북자는 어느새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이 장면은 정한석의 말대로 다분히 도식적인 구석이 있다. 순희가 차려준 밥을 먹고 배가 부르자 그는 술을 요구하고 순희는 술을 건네준 뒤 자리를 뜬다. 그때 아마도 순희가 켰을 텔레비전에서는 북한 찬양 방송이 나오고, 갑자기 미쳐버린 남자는 순희에게 다가가고, 프레임 밖에서 들려오는 순희의 울부짖음,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여전히 흘러나오는 북한 방송의 화면이 겹친다. 이 장면의 모든 상황은 작위적이며, 순희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의 위안을 얻는 걸 제외하고는, 그 작위성은 더없이 끔찍하게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런 명백한 함정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이 순간을 필요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탈북자들에 의해 그런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장면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는 장률의 대답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연히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장면의 작위성에 순결한 여자에 대한 영화의 상투적인 가학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모두 거두지는 못하지만, 만약 이 장면이 있어야만 한다면, 그건 이후 순희의 결단들을 영화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설득이 된다.

순희의 이상한 선택 혹은 장률의 복합적인 심경

순희의 선택들. 그건 창호의 선택과 영화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창호의 것만큼 명백하고 단순하지는 않다.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궁지에 처한다. 그 사건으로 아이를 갖게 된 순희는 할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그녀는 수술실에서 도망을 나오고,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말리지 않는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뱃속의 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한 여자는 결국 아이를 낳는 수순을 따른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의 결말에 그녀는 다시 병원을 찾는다. 순희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지 않고 나온 이후, 그리고 다시 병원을 찾는 시점 사이에 그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 사이에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 슬픈 표정으로 눈밭에 앉아 있던 순희 뒤로 마을의 노인 한명이 지나가다 그 옆에 앉는다. 치매에 걸린 듯 보이는 이 노인은 영화 앞부분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매번 두만강을 건너려다 사람들에게 잡혀 집으로 돌려보내지곤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 손잡고 이 강을 건널 때만 해도 다리 하나가 있었는데”라고 노인이 중얼거리자, 카메라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면 산으로 둘러싸인 얼어붙은 강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 다음 뒤이은 장면에서 순희는 스케치북에 노인에게 들은 다리의 형상을 그려본다.

그림 속 다리의 풍경이 이상하게도 생생하고 그것이 벼랑 끝에 선 순희에 대한 유일한 위로처럼 느껴져서, 이 장면의 연결에는 신비로운 느낌이 있다. 그래서인지 모든 이야기가 종결된 뒤 에필로그에 이르러, 영화가 눈덮인 두만강 위에 과거의 혹은 상상 속의 그 다리를 세워두고 노인으로 하여금 건너게 하는 판타지 장면에서, 문득 그 다리는 영화적으로 순희에 의해 마련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순희가 다리 그림을 그린 뒤에, 영화가 에필로그에 이르기 전, 그녀로 하여금 기어이 낙태를 선택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더 당혹스럽다. 순희는, 혹은 영화는 상상 속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정서적인 다리를 한편에 기어이 만들어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탈북자의 폭력에 의해 잉태된 아이를 죽이는 결단을 내린다. 물론 그 뱃속의 아이를 어떤 상징으로 단정하고 해석하는 건 위험한 짓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런 두 가지 선택이 영화 속에서 양립할 때, 나는 둘 사이의 간극에 영화의 슬픔이 있다고 느낀다. 말하자면 고향에 대한 장률의 분열. 장률은 어찌할 수 없는 두 마음을, 과거와 현재를, 상상과 현실을 내버려두고 바라본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봉합하거나 채우지 못한다. 순희는 고통을 무릅쓰고 아이를 낳아 이 분열을 메워주는 천사가 아니다. 나는 순희가 장률이 천사라고 칭했던 <이리>의 백치 같은 여인 진서보다 장소의 기억에 대한 장률의 감정이 훨씬 더 구체화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순희가 낙태를 한번 미루고 영화의 끝에 다시 병원을 찾는 시점은 창호가 투신하는 시점과 영화적으로 맞물리며 그건 다분히 의도된 영화적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률은 기억 속의 고향이 결국 삶으로부터 죽음으로 부서질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것일까. 혹은 마지막 에필로그의 판타지를 개입해서라도 죽음으로부터 희망을 불어넣고 싶은 것일까. 둘 다 아닌 것 같다. 고향을 판타지적으로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 혹은 리얼리즘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 모두 왜곡과 미화, 냉소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걸 장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러므로 <두만강>의 어떤 부분이, 누구의 선택이 사실적이고 상상적인지, 이 세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다만 나는 장률에게 있어서 고향의 기억을 영화화하겠다는 결심이 희망과 절망, 혹은 삶과 죽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감히 죽음으로부터 삶을 구원할 수도 없고, 행여 그럴 수 있다고 믿어서도 안되지만, 적어도 죽음을 죽음으로부터 꺼내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창호의 마지막 행위, 그 두 번째 죽음은 단순한 자멸이 아니라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마을의 노인이 죽던 날 밤, 사람들이 애도의 노래를 부를 때 환하게 뜬 보름달의 정서, 할아버지가 창호에게 “내 죽으면 여기 묻어라. 앞에 두만강이 보이지 않니”라고 말할 때 노인의 시선을 따라 펼쳐진 아련한 강의 감정, 그러니까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그 순간 영화에 퍼지는 죽음이라고도, 삶이라고도 표현할 길 없는 절실한 기운. 다시 말하지만 죽음을 죽음으로부터 꺼내는 것, 그것이 장률의 기억이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최소의 예의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두만강>은 고향에 대한 오랜 기억과 마주한 감독이 일상적 구체성을 넘어서 감정의 물질성에 도달하려는 시도다. 설령 그 시도의 결과가 관념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해도, (그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 관념도 기꺼이 끌어안겠다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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