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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미한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에 대한 보다 냉정한 평가

<파수꾼>

윤성현의 데뷔작 <파수꾼>은 과대평가되었다. 인상적인 데뷔작이지만 만장일치의 찬사를 받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왕의 비평이나 에세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글들, 상처를 겪고 성장한다는 청춘영화의 클리셰를 바꿨다는 김혜리의 평가나 서사의 지연과 생략과 겹침을 통해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장병원의 평가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서 윤성현의 재능을 한껏 추어올리는 것은 장차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낼 이 젊은 감독에게도 독이 될지 모른다.

무엇보다 <파수꾼>은 차근차근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서사, 장병원의 분석대로 등장인물들의 회상을 축으로 조금씩 정보를 관객에게 열어주는 구성이 상당한 긴장을 축적하지만 그 정보가 응축돼 터졌을 때 이걸 위해 이렇게 힘들게 왔단 말인가, 라는 허탈감을 준다. 고등학생인 주인공 기태는 죽었고 살아남은 그의 친구들은 침묵한다. 기태의 아버지는 기태 생전에 친한 아이들을 찾아가 기태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알려고 하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한다. 기태의 아버지는 스토리를 끌어가기 위한 맥거핀 기능을 하는 인물로, 그가 접촉하는 희준은 그보다 좀더 알고 기태 아버지의 부탁으로 희준이 오랜만에 만나는 동윤은 사태의 전말을 누구보다 많이 안다. 희준과 동윤 사이에 공유되는 기태에 대한 정보의 양도 동일한 것이 아니어서 이 어긋남이 그들 우정의 파탄의 핵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적어도 관객은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상대 친구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안다고 해서 더 잘 이해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상대에게 전달할 것이 적은 빈곤한 내면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힘들어했는지도 모른다. 관객이 알게 되는 진실은 떠들썩한 활기로 점철된 영화 속 고등학생 아이들의 내면이 더할 나위 없이 여리고 허약했다는 것, 그리고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추스르기에도 급급해서 상대방 친구의 내면을 감촉하는 데는 서툴렀다는 것이다. 이 명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김혜리나 장병원의 지적대로 <파수꾼>은 이것의 토대 자체를 흔들었다. 그들은 성장하지 않았고 거대한 폐허 속에 내던져진 상태가 되었으며 그 거대한 파국의 알맹이는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사소하다. 이 사소함을 전면화시킨 것이, 정형화된 상처의 틀로 가두지 않고 후벼 판 것이 <파수꾼>의 흥미로운 점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건 성장기의 소년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인간관계에서 관철되는 양상이기도 하다.

소소함을 소소함으로 끝까지 끌고 나갔더라면

그렇지만 불만은 남는다. 도입부에 제시된 주인공 기태의 죽음의 원인과 그걸 찾아가는 해명의 과정에서 마침내 남은 결론은 기태가 또래의 짱으로 군림했으나 친구들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하는, 일시적인 그 권력의 위계를 즐긴 만큼 거대한 공허를 감추고 있었고 그건 기태를 제외한 주변 친구들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태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 유명인, 자신이 체화한 가치가 아니라 세속의 가치에 자신을 의탁한 채 친구들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그 유사권력의 환상을 즐겼다. 친구이자 보스로서 그는 자신의 뜻대로 친구들이 행동하지 않을 때 제재를 가함으로써 수직적인 교우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그는 그걸 우정으로 여겼으나 이 일방적인 시혜로서의 우정은 친구들에게 진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희준은 기태의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일정 기간 받아들이다가 여자친구 문제로 서먹해지면서 거부한다. 반대로 기태는 희준이 좋아하는 여학생이 자신을 좋아할 때 친구를 위해 그녀의 마음을 받지 않았지만 어머니 없이 사는 자신의 처지를 희준이 비웃는다고 생각하고 꽁해 있다.

이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고 비극의 결말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에 유명인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환상을 고교 시절만이라도 누리고자 했던 기태의 권력욕이 친구들의 외면으로 무참하게 부서지면서 일어난다. 정형화된 결론은 아니지만 이걸 장르영화의 외관에 기꺼이 맞추려 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생긴다고 나는 보았다. 소소함을 소소함으로 끝까지 끌고 나갔더라면, 영화 속에 제시된 비극의 그릇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군림하려다가 그것이 강제된 우정임을 친구들에게서 고백받고 좌절하는 기태의 내면적 욕망이 초등학생 시절 국민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의 좀 다른 버전이라는 것에 어쩐지 허전함을 느꼈다. 이것으로 그의 불행한 죽음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파수꾼>에는 세 주인공의 어긋나는 관계만큼이나 그들이 좋았던 시절의 묘사도 함께 나온다. 기태와 동윤과 희준이 친했을 때 그들은 폐쇄된 역의 철길에서 야구공을 갖고 논다. 기태가 애지중지하는 그 공은 대단한 사연을 품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냥 기태의 욕망의 표식이다. 나중에 다른 학교로 전학 간 희준을 찾아간 기태가 자기 마음을 담아 애지중지하던 공을 희준에게 주고 떠날 때 기태는 아마 과거의 유치한 욕망을 떼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 관계가 복원될 수는 없고, 영화의 말미에 우리가 갖게 되는 감정은 어처구니없는 욕망들의 충돌과 오해가 대면하게 된 비극의 실체에 대한 당혹감이다. 그들의 (그리고 우리의) 왜소한 신세와 그 안에 같잖게 정리되지 않은 형태로 들어 있는 욕망들이 예상하지 못할 만큼 휘발성이 강하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도구적으로 기능화된 일부 인물들의 묘사

<파수꾼>의 구조는 다시 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보면 이 서사의 뒤틀림은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아버지는 끝내 사건의 방관자가 되어 밀려나고 영화 속에서 동윤과 기태의 우정의 파국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는 동윤의 여자친구 세정의 자살시도도 자세히 맺음되지는 않는다. 다소 도구적으로 이야기에 기여한 이 인물들의 처지는 그렇게 기능적으로만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소소한 것의 전면화를 시도한 이 영화가 일부 인물들의 어쩔 수 없는 기능화를 초래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쓰다 보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장르관습의 정형화된 틀과 그걸 깨려는 파격 사이에서 <파수꾼>이 훌륭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소소한 것에서 거대한 파국을 보면서 다뤄내는 형식은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균형이 맞지 않는 또 다른 지점은, 등장인물들이 갈등하고 싸우는 부분보다 그들이 즐거워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장면 묘사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이건 연기 연출과도 관계가 있는데 기태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즐거워하며 놀고 있을 때 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캐릭터로 나오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보다 이들 사이의 갈등이 전면화될 때 배우들은 비로소 진실한 존재감을 풍겨내는 듯이 보인다. 이 부분에서 <파수꾼>은 종래의 여타 청춘영화들이 따라올 수 없는 굉장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내성적이기도 하지만 실은 친구의 권력에 눌려 표현을 거부하는 희준을 연기하는 박정민은 꽁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답답한 캐릭터에서 어느 순간 소통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인간의 막힌 지점을 활짝 열어 보이는 놀라운 순간을 드러내 보인다. 세 주인공 중 가장 안정된 성품으로 보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통제할 때 무력감을 드러내는 동윤을 연기한 서준영 역시 쾌활한 모습을 보일 때와 가라앉아 있을 때의 에너지의 고저를 인상적으로 포착했다. 이 영화에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만큼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주인공 기태 역의 이제훈이다. 기태는 폭발 직전의 무서운 눈빛을 지닌 캐릭터지만 자신이 내세우는 공격적인 기운이 불안의 다른 얼굴이었음을 자연스레 관객에게 설득시킨다. 영화 후반에 그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의 반전을 지켜보면서 이 배우는 올해 대다수 국내 영화제의 신인배우상을 독차지해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 윤상현은 배우들의 연기를 끌어내는 바로 이 재능 덕분에 향후 주목할 만한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외관이나 구조를 짜는 솜씨는 평단의 과찬만큼 특출할지 확신이 없으나 배우들과 소통하는 능력 면에선 남들이 갖지 않은 걸 갖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은 머지않아 더 높은 레벨에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파수꾼>은 인상적인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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