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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아무리 애를 써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혜리 2011-04-08

치과에 가다. 진료실의 액정TV는 7년째 24시간 뉴스채널에 고정돼 있다.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세계에 만연한 재앙과 분쟁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곧 닥칠 치료의 통증쯤은 티끌만도 못하다는 기분이 든다.

※<네버 렛미고>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월19일

정처없이 흘러다니는 우리의 시선은 아름다움과 마주치면 정박한다. 아름다운 사물, 아름다운 사람은 그에게 닿기까지 소요된 모든 응시를 표류로 만들어버린다. 애초부터 그를 보기 위해 두눈이 존재하기라도 한 것처럼.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의 죽음>에서 주인공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더크 보가드)의 눈은 꽃다운 소년 타치오(비요른 안드레센)를 부단히 뒤따른다. 패닝(panning: 고정된 카메라의 가로 방향 움직임)의 끝은 언제나 타치오로 정해져 있다. 확고한 표적을 향해 헤엄쳐가는 아셴바흐의 시선 앞에는 지중해 풍광도 산마르코 광장의 전망도 거추장스런 암초에 불과하다. 늙은 사내의 주책이 민망하다고? 영화의 교활함을 얕보아선 안된다. 당신은 어느새 아셴바흐의 ‘공범’이 되어 전경 숏이 등장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타치오를 찾아 헤매는 자기를 발견하게 될 테니까.

<베니스의 죽음>을 밀어가는 드라이브는 노쇠한 남자가 품는 청춘에 대한 애절한 동경이지만 최상의 아름다움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태어날 따름이라는 믿음에서도 비롯된다. 극중 대사를 통해 비스콘티는 무릇 인간이 창작한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재능과 노력 이전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고로 예술가는, 계획에 의해 아름다움을 짓는 자가 아니라 광대한 어둠 속 어딘가에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요행히 적중하기를 바라며 활을 쏘아대는 궁사다. 미소년 타치오는 노력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그래서 더욱 우월한 아름다움의 현신이다. 평생 갈고닦은 예술도 미인을 이길 수 없다니 얼마나 허망한 비보인가. 악덕으로 쉽게 운위되는 외모지상주의는 우리가 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위력적인 강적이다. 기존 규범이라면 모조리 부수려고 한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도 젊은 육체의 아름다움에는 기꺼이 예속되지 않았던가?

저메인 그리어의 책 <아름다운 소년>(The Beautiful Boy)은 신화와 역사 속 미소년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1970년 데이비드 베일리가 찍은 비요른 안드레센의 흑백 사진을 골라 표지로 썼다. 안드레센의 경력에서 <베니스의 죽음>은 시작이자 정점이었고, 이후로는 몹시 길고 지루한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 16살 안드레센은 표시된 지점에 멈추고 포즈를 취하고 신호에 따라 미소 짓는 전형적인 마리오네트형 연기를 보여준다. 팔다리에 감독이 묶어놓은 줄이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날 지경이다. 이처럼 자의식이 드러나는 미숙한 연기에도 영화가 치명적 해를 입지 않는 까닭은 극중인물 타치오 역시 ‘연기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타치오는 자신의 매력이 나이든 남자에게 끼치는 영향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 효과를 음미하고 있는 중이다.

3월20일

어제 내가 본 <베니스의 죽음>은 과연 십수년 전 본 <베니스의 죽음>과 같은 영화라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 미처 수용 못한 부분을 이해하게 된 반면 그때 보고 들은 것 중 일부에 눈멀고 귀 닫기도 했을 터다. 긴 시간을 사이에 둔 이 경우와 별개로, 한편의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나한테 적당한 관람 횟수는 두번이다. 한번은 너무 적고 세번은 과하다. 첫 번째 관람은 척후(斥候)의 시간이다. 나는 걸스카우트가 되어 영화의 지형을 답사하고 속임수가 매복한 위치를 정찰하고 순식간에 지나간 비경을 다음에 눈여겨보리라 담아둔다. 이렇게 보면 첫 번째 관람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그 영화를 한번 더 볼지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3월21일

<네버 렛미고>는 오로지 대체 장기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복제된 인간들의 이야기다. 성년이 되고 오래지 않아 적게는 2회에서 많게는 4회의 ‘기증’을 마치고 텅 빈 자루처럼 버려질 아이들의, 도중에 강제로 뜯겨져나간 성장담이다.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 소설도, 마크 로마넥의 영화도 따로 시간을 내서 인간 복제 시스템과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다. ‘복제인간’이라는 용어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고 세 주인공이 자라나는 헤일셤 학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별나게 보건에 신경 쓰는 기숙학교 정도로 보인다. 단, 죽음을 가리키는 ‘완수하다’(complete)라는 표현, 성(姓)을 이니셜로만 쓰는 관습, ‘근원자’(original)등의 생소한 단어만이 불길한 윤곽을 서서히 더듬게 한다. <네버 렛미고>에 투쟁하는 리플리컨트는 없다. 가혹한 조건을 주어진 현실로 당연시하는 이 완벽한 체념의 공기는 (정치적 바람직함을 논하기 전에) 이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극중 세계는 흡사 어항과 같다. 태어날 때부터 석양의 시간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세계를, <네버 렛미고>는 청색과 오렌지색의 빛으로 그린다. 먼 미래 따위는 없는 주인공들은 사소한 일상 대화 속 권력관계에 연연하고 작은 마음의 빚에 질질 끌려다닌다. 암시와 비유로 지어 올린 세계에서 양육된 까닭에 그들의 대화는 변죽만 울리는 특이한 화법으로 이뤄진다. 요컨대 바깥세상의 감정이 갖는 진폭이 1에서 10이라고 치면 삶의 많은 부분을 상상으로만 체험하는 복제인간들의 그것은 3에서 7 정도로 제한돼 있다. 이 아픔을 현실의 저울로 환산해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몫이다. 그래서 <네버 렛미고>의 슬픔은 일단 마음 밑바닥에 침전됐다가 극장을 나와 휘저어볼 때야 수면 위로 떠오른다.

헤일셤 학교의 학생들에겐 나무 궤짝에 소중한 물건을 수집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이미 고고학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내기에 가슴 저리다. 이 작품의 제목은 “나를 떠나지 마”가 아니라 “나를 보내지 마”다. 남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주인공 모두 사라져갈 사람들이므로. 세 주인공 중 루스(키라 나이틀리)가 떠난 자리에는 캐시(캐리 멀리건)와 토미(앤드루 가필드)가 남고, 토미가 떠난 자리에는 캐시가 남는다. 영화는 거기서 관객의 손을 잡아당긴다. 마지막으로 그 자리로 불려가 캐시의 “나를 보내지 마”라는 애원을 들어야 할 자는 결국 우리다.

<네버 렛미고>에는 동시대를 무대로 하는 SF 특유의 서늘함이 있다. 현실에서는 아직 기류로서만 떠돌고 있는 징후를 꼭 집어 실물의 형상을 갖춘 서브컬처로 눈앞에 던져놓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지진으로 원전방사능 누출 위기를 겪으며 세계가 꼭 이만큼의 전력을 써야만 하는 걸까 의문을 품었다. 대체장기 수요 중 일부는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기대 수명이 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선을 넘었기 때문에 발생할 것이다. 머지않아 도덕적 당위 때문이 아니라 종 전체가 살아남기 위해 덜 욕망하고 덜 소비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아닐까? 집에 돌아오니 일본인 친구가 페이스북에 남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지진은 이곳 사람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어떤 식으로든 크게 바꿔버렸어. 모두들 전환점을 맞닥뜨렸다고 느끼고 있어.”

3월23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타계했다. 내게 리즈 테일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자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둘은 반드시 같은 얘기는 아니다. 부음을 접하고 리즈 테일러가 1993년 AFI 평생공로상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비평가들도 저 자신도 저를 그다지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죠? 안 그래요? (좌중웃음) (중략) 스스로 배우라고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꽤 긴 소감을 한치 오차없이 효과적으로 조율된 표정과 억양으로 전달하고 여왕의 걸음으로 단을 내려섰다. 동영상 속 기립박수를 치는 청중 중에는 지난해 고인이 된 데니스 호퍼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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