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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시네마나우] 대만영화의 갈림길

역대 최대 제작비 드는 <시디그 베일>… 대만 영화산업 부활시킬까

<시디그 베일>

오는 9월5일과 20일, 대만에서 한편의 영화가 1, 2부로 나뉘어 개봉한다. 웨이더솅의 <시디그 베일>이 그것이다. 이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는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대만 영화산업의 명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총제작비 6억위안(약 200억원)은 역대 대만영화 제작비 중 최고다. 이 작품의 흥행 결과에 따라 대만 영화산업이 부활할지, 계속 침체의 길을 걸을지 판가름날 것이라는 것이 대만 현지 분위기다.

<시디그 베일>은 웨이더솅의 드림 프로젝트다. 그리고 그의 이 드림 프로젝트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웨이더솅은 에드워드 양의 조감독 출신이다. 1999년 <칠월천>으로 데뷔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채 1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제7봉>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흥행수입이 무려 5억위안이었다. 이는 대만영화사를 통틀어 <타이타닉>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흥행수입 기록이었다. 대만 정부는 <제7봉>의 흥행에 고무되어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러나 썩 만족할 만한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2001년 0.1%에 불과했던 대만영화의 자국 시장점유율이 <제7봉>이 개봉된 2008년에는 12%까지 올랐지만 2009년에는 2.3%, 2010년에는 7.65%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대만 영화산업의 미래에 대해 의구심이 높아져가고 있는 중요한 시점에 대작 <시디그 베일>이 개봉을 하는 것이다.

<제7봉>의 성공 이후 정부의 제작비 지원도 늘고, 투자 유치도 원활해졌다. 그리고 웨이더솅은 자신의 드림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시디그 베일>은 일제시대 일본군에 저항한 원주민 시디그족에 관한 영화다(‘시디그 베일’은 시디그어로 ‘진짜 남자’라는 뜻이다). 그들의 용맹성은 익히 알려졌지만 일제시대 때 벌인 그들의 저항운동은 지금껏 언급된 적이 별로 없다. ‘우셰 사건’으로 불리는 이들의 항쟁은 1930년대 일본군이 대만 난투현의 우셰 지역에까지 진격해오자 족장의 아들 모나 루다오를 중심으로 결사항전을 펼친 역사적 사건이다. 시디그족은 215명에 달하는 일본인을 살해했으며, 이에 놀란 일본 정부는 수천명의 일본군을 보내 시디그족 대학살에 나섰다. 그 결과 단 298명의 시디그족만이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웨이더솅은 25명의 메인 캐릭터 중 대부분을 실제 시디그족, 아타얄족, 타로코족 사람들로 캐스팅했고, 대사의 대부분도 시디그어다. 때문에 이 작품은 대만의 일반 시민들에게도 매우 낯선 영화가 될 것이다. 웨이더솅은 <제7봉>을 만든 이유가 <시디그 베일>의 제작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힐 정도로 작품에 애정이 크다. 12년 동안 시나리오를 10번 이상 가다듬었는가 하면, 린코 지역의 3,600㎡에 달하는 대지에 8천만위안을 들여 30년대의 우셰 거리를 재현하고 한국과 일본의 특수효과 전문가들을 영입하는 등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비비안 수, 루오메이링, 랜디 완 등 지명도 높은 여배우들도 웨이더솅의 열정을 높이 사 무보수 출연을 자원했고, 오우삼도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대만영화에는 그동안 터부시되어왔던 주제들이 있다. 과거 국민당 정부 시절 행해졌던 백색테러와 2·28사건, 그리고 소외받는 원주민들의 삶 등이 그것이다. 80년대의 뉴웨이브가 전자의 아픈 기억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 청원탕, 황밍추안 등이 후자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웨이더솅의 <시디그 베일>은 또 다른 터부에 대한 도전이다. 시디그족은 2008년에야 대만 정부로부터 14번째 원주민 부족으로 공식 인정을 받은 소수부족이다. 그리고 ‘우셰 사건’ 역시 그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어왔던 역사적 사실이다.

이처럼 <시디그 베일>은 대만 영화산업에서, 그리고 대만 영화사에 있어 작품성과는 별개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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