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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의 예술판독기] 관객에게 '주어진 것'

토마스 스트루스, 루브르 박물관 3, 1989

창작자의 손을 떠난 예술품의 존립이 저 스스로 보장되는 경우란 없다. 창작품, 전시공간, 그리고 관객. 이 균형 잡힌 삼박자로 사물은 예술로 승격된다. 관람이란 가벼운 박수나 탄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적극 개입과 품평을 통해 관전 대상의 생존을 좌우하는 심판의 형식으로도 표출된다. 그렇지만 미술관 관객의 공격성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축에 속한다. 서사의 태부족과 시각 자극 '한방'에 의존하는 미술의 속성상 교양층 관객조차 품평이 닿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다. 미술이 위상을 보장받는 장점이자, 세간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단점도 이 때문이다. 음악, 연극, 영화처럼 인접 예술의 재현이 '원작'에 대한 후대의 무수한 변용이기 십상인 데 반해 원작 자체를 보존하고 제시하는 미술의 관람 논리는 전시장안에서 작품을 관객보다 우위에 놓는다. 으레 고대 유물이거나 희귀품 혹은 유일무이한 단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에서 관객과 작품은 일정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그것은 감상보다 접견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신전에 입장한 신자가 아우라의 압력에 위축되는 것처럼 미술관 입장객도 성지 참배객과 유사한 마음가짐을 취한다.

1990년대 세계 화단은 변별력있는 매력 때문에 독일 사진을 주목했다. 동종의 피사체들을 반복 촬영한 초대형 인화지가 하나의 범주로 묶여 제시된 바, 촬영된 사물의 중성적 자태에서 숭고한 매력이 읽혔기 때문이다. 동일 대상들만 모아놓은 공장이나 건물의 중성적 정면을 주로 선택해서 찍었다. 유형학적 사진가 토마스 스트루스는 작품 연보 속에 뜬금없이 미술관 연작을 포함시켰는데, 세계 유명 미술관의 내부를 담담하게 응시한 연작이다. 천장이 높은 미술관과 그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관객의 동태는 어느 미술관이건 대동소이했다. 때문에 공장 사진의 유형마냥 정태성도 강했다.

마르셀 뒤샹, <주어진 것>을 외부에서 바라본 모습

미술관의 관객은 흔히 길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 이유인즉 미술품에 인위적으로 부여된 권위가 내리누르는 압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시적인 감정표출이 교양의 지표인 양 믿고 작품앞에서 감정과잉의 주문을 거는 속물보다 관람논리에 무지한 다수 관객의 진솔함이 상태 면에선 양호하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은 현대적 개인주의자의 시대에 공개된 장소에서 작품을 접하는 건 낯선 경험일 거다. 이를 예견/배려라고 한 작가가 있다. 50년 전 실험예술가 뒤샹은 아상블라주 <주어진 것>이라는 유작을 남겼는데, 문틈에 난 구멍 두개에 밀착해서 내부를 엿보도록 설계했다. 관람의 일반 문법을 거스른 이 작품에 대해 화가 재스퍼 존스는 "어느 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괴상한 미술품"이라고 평했다. 오프라인 전시공간에서 위축된 관객도 온라인에 옮겨 온 작품 이미지를 모니터 앞에서 응시할 때는 떳떳하고 대등해진다. 이 때문일까? 애써 미술관까지 찾은 수많은 동시대 관객은 실물의 직접 대면을 미룬 채 사진기 메모리카드에 연방 작품 정보를 담기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