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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눈을 붙잡아둘 흡입력이 아쉽다 <워터 포 엘리펀트>
장영엽 2011-05-04

미국인들이 1920년대의 호황기만큼 자주 언급하는 시기가 30년대 대공황이다. 그 시절을 오직 경제 침체와 굶주림의 시기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렵기 때문에 이웃을 모른 체하지 않았던 온정의 시절로 추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워터 포 엘리펀트>는 그 ‘온정’으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다. 코넬대 졸업을 앞둔 전도유망한 수의학도 제이콥(로버트 패틴슨)은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집안의 빚을 떠안은 빈털터리가 된다. 무작정 집을 나와 길을 걷다가 우연히 곁을 지나던 기차에 올라타는데, 운좋게도 그 기차는 동물을 가득 싣고 이 도시 저 도시로 유랑하는 ‘벤지니 서커스단’의 소유다. 서커스 단원들은 인심 좋게도 이런 불황의 시대에는 젊은이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그 태도 참 부럽다) 제이콥을 기차에 머무르게 해준다. 제이콥은 서커스에 출연하는 동물들을 돌보며 말과 함께 묘기를 선보이는 단장 부인 말레나(리즈 위더스푼)와 가까워진다. 서커스단의 부진에 예민해진 단장(크리스토프 왈츠)이 횡포를 부릴수록 제이콥과 말레나는 서로를 위로하며 위험한 사랑에 빠져든다.

<워터 포 엘리펀트>는 사라 그루엔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나는 전설이다>의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은 1930년대의 미국 전반을 가로지르는 400페이지 분량의 대서사시를 꽤 깔끔하게 정리해냈다. 이른바 ‘딴따라’로 통칭되는 서커스 집단 내에도 엄연한 계급과 문화가 있다. 서커스 기차 1등석의 단장 부부는 자주 파티에 다니며 최고급 샴페인과 요리를 먹지만 3등석의 단원들은 가짜 술을 마시다가 몸이 쇠약해지면 기차 밖으로 내던져진다. 이 ‘차이’의 중심에 서 있는 건 제이콥이다. 그는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주 단장 부부와 어울리나 달콤한 술자리가 끝나면 늘 3등칸의 초라한 객실로 돌아와 선잠을 자야 한다. 이 드라마틱한 역할을 맡아 영화의 결을 살리기에 로버트 패틴슨은 아직 내공이 부족한 듯하다. 1등석이든 3등석이든 동물 우리든 단장 부인과의 잠자리에서든 늘 한결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이 배우에게 미국의 1930년대를 향한 안내자 역할을 바라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 대신 <앙코르>(2005) 이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리즈 위더스푼과 악역임에도 연민을 자아내는 크리스토프 왈츠가 안정적인 연기로 설익은 청춘배우를 뒷받침해주는 형국이다.

아쉬운 점은 관람 도중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커스단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통렬하고 비극적으로 그려내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화면을 채우는 애크러배틱한 묘기는 아름답고, 인정 넘치는 광대들은 정감가지만 다음 세대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편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그들을 지켜보는 경험은 움직이는 흑백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옛날 사진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관객의 눈을 붙잡아둘 흡입력의 부족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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