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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과 연계된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집중하자 <사랑을 카피하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 미술 관련 서적을 쓴 영국인 작가 제임스 밀러(윌리엄 쉬멜)가 출판 기념 강연회를 열고 있다. 그의 책과 강연의 주제는 요약컨대 세상의 원본에 집착하지 말고 좋은 복제를 받아들이자 정도가 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강연 내용을 우린 더 자세히 알 수 없다. 대신 그때 어린 아들을 대동한 중년의 여인(줄리엣 비노쉬) 한명이 강연회장에 등장한다. 그녀는 보채는 아들을 어쩌지 못해 일찍 자리를 뜨면서 작가에게 쪽지를 남긴다. 이윽고 작가가 여인을 찾아오고 둘은 작가가 기차를 타야 하는 시간인 9시 전까지 여기저기를 함께 둘러보기로 한다. 여인과 작가는 원본과 복제(모사)에 관하여, 그런 관계로 비춰볼 수 있는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에 관하여, 혹은 예술에 관하여 토론에 가까운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여자의 남편의 이야기가 대화 중 흘러나오자 여자는 작가를 마치 자신의 남편인 양 상정하고 말하고 그러자 작가는 그런 여자의 행동에 정말 남편인 것처럼 반응한다. 그들은 그들이 역할극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미 한번 시작된 역할극이자 모사의 관계는 이제 그들 사이의 원본의 관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공인된 모사’ 혹은 ‘인증받은 모사’를 스스로 갖춘다.

현대영화의 위대한 시인이자 이란의 거장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이다. 무척 오랜만이다. 한국에서 그의 작품이 정식 개봉된 건 <ABC 아프리카>(2001)가 마지막이었다. 키아로스타미는 2000년대의 첫 10년 동안 그 누구보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디지털영화로 돌진했고 한편으로는 비주얼 아트의 친연성을 의식하며 그 영화들을 실험했다. 그러다 문득 10여년이 지나 비교적 전통적인 영화에 속하는 <사랑을 카피하다>로 돌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키아로스타미 영화 사상 첫 번째 시도하는 것들이 즐비하다. 키아로스타미가 이란 바깥에서 처음으로 만든 장편극영화이고, 이란어가 아닌 대사들이 그것도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가 섞인 다국적 대사들이 등장하고, 줄리엣 비노쉬라는 걸출한 대배우가 연기를 맡았다. 하지만 더 중요해 보이는 건 키아로스타미 영화미학의 일종의 또 한번의 격동이다. 영화는 무척 단순해 보이지만 여러 층위에서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원본과 모사의 상식을 뒤엎는 암시적 관계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물들과 연계된 ‘보는 것과 듣는 것’에 관심을 둬보자. 한 가지, 키아로스타미는 필시 이 영화가 스스로 활동하는 마술에 속하기를 바란 것 같은데, 좀 지나치게 딱딱한 개념과 개념극 때문인지 거기까지 이르는 건 좀 어려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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