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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가끔은 어떤 영화여도 상관없지 않을까
김혜리 2011-05-13

4월7일

극장에서는 바야흐로 여름영화 예고편이 볼륨을 높이고 있는데, 두터운 외투를 벗으면 여전히 벌거벗은 기분이다. 서울의 겨울은 해마다 길어지더니 급기야 나머지 세 계절이 어땠는지 가물가물해질 무렵에야 내키지 않는 발을 끌며 물러가는 지경이 됐다. 도무지 그리워할 틈을 주지 않는 그 집요함에 진저리를 친 요 며칠이었는데,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열리는 신촌으로 향하는 길에 곳곳에서 시야로 덤벼드는 꽃무더기에 겸연쩍어졌다. 둔해진 쪽은 계절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수신하는 감각이 퇴화하고 있나보다. 동화 <메리 포핀스>에서 지금도 기억하는 장면은 창턱에 날아드는 새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던 요람 속 아기들이 어느 날 아침 자연의 언어를 잊자 작별인사조차 못하고 쓸쓸히 떠나가던 새들의 모습이다. 그처럼 돌멩이나 개미와 이야기하던 아기들은 자라서 인간의 아이들하고만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친구들과 어울려 야구하던 소년들은 어른이 되면 벽을 상대로 공을 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친구도 아닌 사람들과 오직 몸을 관리하기 위해 운동을 한다. 고독은 조용히 부피를 불려가고, 때로는 스스로와 대화하는 법도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가 극장 밖에서 삶을 사는 동안보다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 더 인간적인 상태가 된다고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4월15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어머니와 보러 갔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극장 온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티켓을 받고 나서야 그 순간까지 엄마가 무슨 영화인지 제목조차 묻지 않은 채 내 손을 잡고 극장까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은, 어떤 영화여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극중에서 식구들의 홀대를 받는 엄마(배종옥)가 “다들 밥 먹는 게 유세냐?”라고 일갈하자 옆에서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놀랍고 신비로웠다. 나는 엄마가 어디서 웃을지 어느 대사에 눈물을 흘릴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가족들에게는 ‘속죄’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그들은 아내/엄마의 병을 알고 나자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증언하고 마음 깊은 곳에 미처 말하지 못한, 얼마나 무지막지한 사랑이 잠들어 있었는가 표현한다. 그런데 연방 눈물을 닦으면서도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죽는다고나 해야 확인할 수 있구나.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차라리 작은 친절을 택하겠다. 시한부 인생이 소재로 쓰인 영화의 곤란한 점은, 비밀이 밝혀지고 모든 인물이 반성과 화해를 수행하고 나면 관객이 본의 아니게, 병든 인물이 죽기- 내러티브의 예고된 대단원- 를 기다리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매우 난감한 시간이다.

4월19일

불만을 끌어안고 <상실의 시대> 상영관을 걸어나왔다. 트란 안 훙의 영화는 거친 번역의 양장본 같았다. 문학적 평가야 어떻든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중요한 이야기다. 20대 말미에 1년 동안 서울을 떠날 짐을 꾸릴 때도 그 소설을 챙겼다. 서구 대중문화의 영향, 정치사회적 동요 등 많은 요소들이 평자들에 의해 거론됐지만 역사의 어떤 조홧속과 중재로 60년대 후반 성인이 된 일본 소년의 이야기가 90년대의 나를 건드렸는지는 확실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인생이란 줄곧 성장하고 무엇인가를 얻고 확장되는 과정이라고 여겼던 믿음이 흔들린 순간에 그 소설은 마침 내게 도착했다. 영화를 보면서 <노르웨이의 숲>이 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처음 인지했다. 과연 돌아보니 섹스장면이 꽤 많은 소설이었다. 그런 각색의 관점도 충분히 가능하다. 각색에 따르는 트란 안 훙 감독의 생략과 확대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내게는 불가결한 장면들이 삭제되고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길게 강조되었다는 점은, 나의 개인적 불행일 따름이다.

집에 돌아와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으며 어떤 이야기는 회고조로만 말해질 수 있고, 1인칭으로만 진술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현재진행형의 숙명을 가진 영화 매체에는 맞지 않는 DNA를 갖고 있는 것이다. 트란 안 훙 감독을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4월25일

<무한도전>은 아니지만, <마셰티>는 말을 뱉었다가 미션이 돼서 만들어진 영화다. <그라인드 하우스>에 삽입된 가짜 예고편이 열화와 같은 호응에 힘입어 장편이 됐다. 개연성 따위 토티야에 말아먹은 이 히스패닉계 활극은 과연 길티 플레저 덩어리다. 그러나 장편 제작이 잘된 선택이었다는 말은 못하겠다. 예고편 30개를 붙인 듯한 이 영화는 프롤로그가 영화의 나머지를 다 합한 것보다 재밌다. 누구도 90분 동안 자이로드롭을 타거나, 고추피클로 한끼 식사를 다 해결하고 싶지는 않은 법이다. 중반을 넘어가면 감독은 본격 액션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패러디를 하고 있는지 가끔 우왕좌왕한다. <마셰티>가 남기는 물음표 하나. 컬트가 기획될 수도 있을까?

4월27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보고 남아 있던 의문 몇 가지를 민규동 감독님께 메일로 여쭤보았다. 답장 일부의 요약을 여기 적어두기로 한다.

“지금까지 ‘아름다운’의 최상급을 두번 영화제목에 쓰셨어요(<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감독님이 두 차례나 제목에 이 단어를 용인한 데에는 가장 상투적인 말로 뭔가를 돌파해보려는 의지가 있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습니다.”

“제게는 원치 않는 제목의 역사가 있어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때는 <메멘토 모리>로 불리길 바랐지만 이뤄지지 않았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원제는 <달콤한 인생>이었는데 김지운 감독님의 영화보다 제작이 늦어져서 밀렸어요. 그래도 그때의 ‘아름다운’에는 역설의 여운이 있었죠. <앤티크>는 <앤티크>로 충분했는데 개봉 준비 중 갑자기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가 됐어요. 10자 이내로 못 들어오는 운명? <오감도>에 포함된 <끝과 시작>은 둘 중 어느 제목으로 불러야 할지 제겐 지금도 혼동이 있어요. 이번 영화는 원래 <이별>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원작자께서 제목과 인물의 이름은 바꾸지 않기를 희망하셔서 받아들였어요. 그렇지만 모성이라는 명분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그것에 기생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정당하냐는 질문이 영화의 모티브라면, 이번의‘아름다운’은 순진해 보이기까지 해서 고민이 됐어요.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특정시대의 시공간의 속성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매우 계급적인 단어라고 생각해요. 즉 변질되기 쉬운 상대적인 말이지요. 제가 ‘아름다운’이라는 단어를 다시 쓴다면 당대 정착된 미추의 개념을 비틀어 전복시킬 수 있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하지만 결국 만들어지는 건, 아주 의도된 시리즈였다는 걸 증명하듯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 그 정도일지 모르지만…. (중략)

10년 동안 써놓고 만들지 못한 영화가 여섯 작품이 있어요.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어떤 영화를 볼 때 그것은 감독이 ‘원하는 이야기를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결과’라고 믿지만 최소한 저에게는 그 신화는 해당되지 않아요. 절대. 저는 어떤 종류의 영화를 목표로 삼는다면 한계에 부딪쳐보고 싶은 욕구도 있고 완전히 이질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더 찾아보고 싶은 욕구도 있어요. 하지만 그 어떤 목표든 욕구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무엇도 장담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하다거나 힘겹다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영화가 제 인생을 대변하는 세계가 아님이 명백하니까. 그보다 더 가치있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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