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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시선의 교차로 당신은 어디에 서있는가

관점과 시각을 혼용해 한국사회의 다양한 시선 탐사하는 <이빨 두 개>와 <바나나 쉐이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권 연작은 시종 ‘시선’의 의미를 강조해왔다. 2003년 <여섯개의 시선>으로 출발해 2006년 <다섯개의 시선>과 <세번째 시선>, 2009년 <시선 1318>을 거쳐 올해 <시선 너머>까지 유달리 ‘시선’을 전면에 내세운다. 종래의 영화들에서 시선의 개념이 종(種)의 수나 다루려는 제재의 성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시선 너머>에서 ‘시선’은 그 자체로 영화적 레토릭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 <시선 너머>에 함께 묶인 다섯편의 단편은 비교적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영화적 개념으로서 ‘시선’의 문제를 끌고 왔을 때 강이관의 <이빨 두 개>와 윤성현의 <바나나 쉐이크>가 눈에 들어온다. 두 영화 공히 수준급의 단편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거니와 여기서의 쟁점은 시선의 다중성 또는 산포(散布)된 시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영화에서 다뤄지는 ‘시선’이란 개인의 입장을 의미하는 ‘point of view’(관점)와 하나의 대상(이 영화들에서는 타자)에 대한 태도라는 의미의 ‘perspective’(시각) 개념을 혼용하고 있다. 전자가 주관에 근거한 개인의 입장에 가깝다면 후자는 특정한 쟁점을 감싼 집단의식 또는 의식의 스펙트럼까지를 포괄한다. <이빨 두 개>와 <바나나 쉐이크>는 이를테면 타자를 향한 한국사회의 관점(point of view)을 반성적으로 탐사하는 시각(perspective)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박애의 한계를 문답하는 산포된 시선 <이빨 두 개>

<이빨 두 개>는 탈북자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탈북자들의 삶의 진상을 들추어내는 데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최근 빈번히 등장하는 ‘탈북자 영화’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되레 탈북자를 대하는 다기한 입장(point of view)을 그러모아 남한사회의 타자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perspective)를 묘파하려는 작의가 영화 전반을 은근히 감싸고 있다.

탈북한 10대 소녀 영옥(서옥별)과의 의도치 않은 충돌로 이빨 두개가 부러진 준영(박정욱)의 주변 사람을 통해 <이빨 두 개>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놀다가 한 아이가 이빨이 부러졌는데, 그 가해자가 탈북한 소녀라면? 남 일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기겠지만 당신 아이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의연할 수 있을까? 딱히 유쾌한 인연은 아니지만 친밀감을 느끼게 된 여자친구가 탈북자라는 이유로 또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아이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이유로 그 멸시와 조롱의 시선이 나에게까지 돌아온다면 넌 꿋꿋할 수 있겠니?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영화는 남한사회에서 탈북자가 직면한 냉엄한 현실을 들추기보다 탈북자들에 대한 시선의 스펙트럼을 훑는다. 이를테면 아이에게 가해진 피해에 대한 부모의 보상심리와 그저 단순한 아이들끼리의 문제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해자 부모의 입장, 제도적인 해결책을 강조하는 담임교사, ‘돈’의 문제로 접근하는 의사의 해결방식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교차한다. 아이들의 세계로 넘어오면 영옥에 대한 준영의 호의는 타자(탈북자)에 대해 배타적인 또래들의 집단의식에 압도당하고 만다. 하나의 고정점을 가지고 사태를 조망하기보다 넓게 산포된 입장의 충돌과 교차를 통해 안과 바깥, 동일자와 타자를 가르는 견고한 인식의 장벽을 드러내는 전략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선의 범위에서의 한계와 불균형이 아이들이라고 덜하지 않고, 어른들이라고 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빨 두 개>에서 강이관이 주목하는 것은 타자를 대하는 태도에 의식과 그 실행에 있어서의 괴리이다. 탈북자들에 대한 측은지심은 인지상정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나의 이해관계와 결부된 현실이 되었을 때 허물어지기 쉬운 무른 의식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처럼 의식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실행의 한계는 인간 행동에 있어 기이한 불균형을 초래한다. 남한에서 살아가는 데 탈북자들이 겪는 곤경이나 일상의 세목들보다 이미 타자화된 그들을 바라보는 남한의 시선, 그 시선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빙빙 도는 우리의 인식은 치근(齒根)이 부러져 살릴 수 없는 치아처럼 허약하다.

선과 악의 정원을 서성이는 충돌의 시선 <바나나 쉐이크>

윤성현의 <바나나 쉐이크>는 시선(point of view)의 다중성을 심는다. ‘다중성’은 전작 <파수꾼>에서도 입증된 윤성현의 고유한 형상화 방법론이기도 하다. 함께 묶인 단편 중 비교적 가볍고 경쾌한 축에 속하는 <바나나 쉐이크>는 실상 매우 비관적인 이야기다. 인간과 풍속을 타작하는 솜씨가 특출난 윤성현의 장기가 발휘된 까닭에 이야기의 표면은 미끈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의외로 예리한 비수가 숨겨져 있다. 이런 감상은 역시 관객이 다중의 시선을 체험하게 만드는 방식에서 유래한다. <바나나 쉐이크>의 다중성은 <파수꾼>의 그것과 근원적으로 다르다.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에 의해 더욱 모호해지는 진실을 그린 <파수꾼>에 비해 <바나나 쉐이크>는 한 사건을 두고 부려지는 여러 시선의 교차라는 의미에서 다중성을 택한다. 이 멀티풀한 시선들을 굽어보고 관장하는 더 큰 시선(감독의 시선) 또한 존재한다.

영화는 한 집의 이삿날 벌어지는 소동극을 다룬다. 필리핀 이주노동자 알빈(검비르)이 포함된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간 직후 사라진 귀금속. 주인은 면죄부를 미끼로 직원들을 회유하고 훔친 자(들)와 강탈당한 자, 무고를 입증해야 하는 결백한 자들이 각자의 입장(point of view)에서 충돌한다. 동질감으로 뭉친 것처럼 보이는 이삿짐센터 직원들 앞에 떨어진,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서 범인을 색출해야 하는 과업은 일종의 마녀사냥처럼 진행된다. 순간 이들의 관계를 얇게 도포하고 있던 껍질이 벗겨지고 잠복해 있던 내면의 진실이 까발려진다. 시시각각 변하는 입장들의 충돌 속에서 인물들은 손바닥 뒤집듯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고, 그 안에서 미묘한 심경변화가 읽힌다. 주인공 봉주(정재웅)의 예를 들자면 그는 이주노동자 알빈의 편에 선 박애주의자였다가 인종주의자로 표변하더니 이내 감상적인 휴머니스트가 된다. 인간 심리의 스펙터클한 변경은 하나의 맥락에서 나오는 것으로, 영화 안에서는 개인의 입지에 위한 상황에 따른 말 바꾸기로 형상화된다.

하나의 상황 변화에 의해 친밀감에서 의심으로 바뀌는 속내, 우정에서 모략으로의 급전, 회유에서 협박으로 돌변하는 태도, 피해자에서 범인으로 바뀌는 사람들. <바나나 쉐이크>의 장점이자 미덕은 이처럼 절대 선과 절대 악의 편에서 한 현상을 조망하지 않고, 각기 다른 입장에서 곤경을 모면하기에 급급한 인물들을 통해 일그러진 우리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그로 인한 피해가 자신에게 돌아올 때 어김없이 고개를 쳐드는 보신주의를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을 통해 윤성현은 단일한 특성으로 요약되지 않는 인간 행동의 복합적 측면을 스케치한다. ‘이주노동자의 <스카페이스>’라고 불러도 좋을 마지막 장면에서 모순과 갈등이 모두 봉합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 개선된 것은 없다. 가까스로 무마된 상황에서 부르는 봉주와 알빈의 개선곡, 저편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두 사람의 상상은 사뭇 퇴행적이다.

<이빨 두 개>와 <바나나 쉐이크>의 참신성은 관객이 탈북자나 이주노동자 같은 타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조력자(<이빨 두 개>의 준영, <바나나 쉐이크>의 봉주), 중상자, 방관자 모두에게 동화될 수 있도록 한 교차하는 시선들의 다중성에 있다. 타자를 대하는 흩어져 있는 시선과 그것을 관장하는 한 단계 큰 시각(perspective)으로서의 시선의 존재가 이를 가능케 했다. 작중인물들에 의해 표출되는 입장을 달리한 다중적 시선을 한데 모아내고 배치한 두 감독의 생각은 어느 한편에 서기보다 관망의 태도에 가깝다. 이런 이야기 방식을 인권에 관한 적절한 형상화라 할 수 있을까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영화에서는 ‘인권영화’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내용과 형식의 참신성을 이뤄보려는 나름의 고뇌가 읽힌다. 약자들의 비루하고 곤궁한 입장을 대변하거나 편들기보다 그들을 대하는 동일자들이라 믿는 존재들의 시선을 솎아냄으로써 침착한 자성에 도달하려는 것이 저들의 목적이다. 그 목적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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