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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이것은 여자의 역사가 아니다

판타지에 가까운 과거, 한치의 성장도 거부하는 현재의 이야기 <써니>

<써니>가 평단과 관객 대중 모두에게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고 있지만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비판의 지점은 대체로 유사하다(804호 김지미의 영화읽기 ‘지금 현모양처여야 과거를 긍정하나요’를 참고하시오). <써니>가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거기에 어떤 역사성도 없다, 진한 우정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게 결국은 돈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가 대강의 요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는 여자들의 우정을 그리고 있으나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라는 지적인데, 동의한다. 하지만 뭔가 조금은 뻔해 보인다. 과거를 추억하는 회상 영화에서, 현재의 시점에서 복기된 과거가 판타지의 개입을 피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든 윤색되고 미화된 판타지로서의 과거, 그리고 그런 과거가 불러일으키는 향수가 불편하기는 해도, 그게 이런 장르를 지탱하는 핵심인 건 사실이며, 그런 맥락에서라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말하자면 <써니>에서 성인이 된 여자들이 기억하는 과거가 판타지에 가깝다는 점이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서는 별 힘이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써니>에 대한 비판은 현실의 판타지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판타지가 좀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더 초점을 두어 말해져야 한다. 과거와 현재 두 시간대가 동시에 움직이는 영화들이 과거를 재현하며 노골적으로 ‘이것은 어쩔 수 없이 판타지’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거의 언제나 그런 혐의를 품고 있고, 그때 이런 상업영화들에서 중요한 건 판타지와 현실의 균형이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떠올리는 과거의 특수성을 묘사하면서도 그 과거에 현재와는 다른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현재의 현실성을 냉정하게 보여주는 것, 즉 그 둘 사이의 거리를 늘렸다, 줄였다를 잘하는 것이 관건이다.

‘소녀들의 학창 시절=정치적인 무지함’이라는 단순함

그런데 <써니>에는 그 균형감에 대한 의식이 없다. 대신 그 최소의 균형감을 무너뜨리는 데에서 영화의 코미디를 발생시키려고 하는데, 미리 결론부터 말하면 그 코미디가 ‘써니’의 이야기 전체를 판타지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요컨대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과거와 현재 중 어느 한쪽이 판타지에 가까운 게 아니라, 둘 모두 판타지처럼 보인다. 혹은 ‘써니’의 멤버들이 학교를 다닌 1980년대 중반과 25년 이후, 시절의 풍경은 현실인데, 인물들은 모두 판타지처럼 보인다. 일단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써니’ 멤버들의 과거에서 이들의 현재와는 다른 무엇을 향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짝퉁 나이스와 스펙스, 그 시절의 가요와 팝송과 음악 감상실, 디스코바지와 원색의 의상들이 주는 감흥 혹은 날라리들의 패싸움? 아니면 어렸고 함께였다는 사실 자체? 그 시절을 지나온 관객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징적 팩트들을 잔뜩 채워넣은 뒤 영화 안이 아닌 밖에서, 그 팩트들과 관련된 개인들의 추억에 기대게 하는 건 이른바 복고영화들의 게으른 전략이다. 물론 관객의 입장에서 ‘그래, 그때는 그랬지’라며 지금의 자리에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과거와 현재의 거리에 대한 상념에 젖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감한 건 우리가 그러고 있을 때, <써니>의 어른 여자들이 과거를 대하는 과정에는 그 거리가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이 여인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추억하는 게 아니라, 그 과거를 현재로 억지로 끌고 와서 반복하려고 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반복의 퇴행성에 비한다면 잃어버린 과거를 돌이키며 상실감에 젖는 건 차라리 훨씬 건강한 편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80년대, 한국사회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종종 불만을 표한다. 아예 눈 딱 감고 그런 상황들을 보여주지 않는 게 아니라, 전두환이 등장하는 뉴스장면이나 노동운동에 대한 냉소적인 이야기를 삽입하면서 그 정황들의 맥락을 무시하고 지나가버리는 것에 대한 반감일 것이다. 강형철 감독은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인터뷰에서 “당시 청소년들은 정치, 사회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정치, 사회에 대해 정색하고 다루는 영화였다면 달라졌겠지만 <써니>는 오로지 소녀들의 시점에 맞춘 이야기다”(801호)라고 말했다. <써니>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각성을 의식한 장르도, 이야기도 아닌 건 사실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나 <여고괴담> 시리즈처럼 특정 계층 혹은 정체성의 소녀들을 전면화한 한국영화들과 비교해본다면 그가 이야기를 ‘일반적인’ 소녀들의 ‘보편적인’ 학창 시절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이 무심한 범주화를 끝까지 뭉뚱그려 다룬다는 점이다. 소녀들의 학창 시절=정치적인 무지함이라는 망설임없는 등식, 그리고 이 여자들이 결국 강남의 사모님이 되거나 아예 술집 접대부가 된다는 설정. 한때는 모든 걸 공유했던 여자애들이 세월이 흘러 양극단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뼈대가 자못 현실적인 다양한 삶의 이야기로 보이게 하는 눈속임 뒤에는, 실은 일관된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 소녀들은 삶의 조건에 대한 의식없이 자라서, 수동적으로 그저 운이 좋으면 강남의 사모님이, 운이 좀 나쁘면 술집 접대부가 된다.

그러니까 당시 한국사회의 역사적 상징성을 심사숙고하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인물들과 그들이 사는 제도나 시대가 접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당대의 유행가가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아이콘들이 등장해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써니>가 이런 영화들의 가장 기본적인, 다른 영화에서라면 정색하고 말하기조차 상투적인 ‘성장’이라는 주제를 버려두거나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판타지는 이후의 성장을 차단한다. 달리 말해 그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할 적대가 이 영화에는 없다는 말이다. 오해하지 말길. 내가 여기서 말하는 적대란, 일방적으로 외부의 표피적인 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적을 향할 때, 결국 자신의 내면, 자신이 살고 있는 토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성격의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칠공주 ‘써니’와 또 다른 날라리 언니들의 집단이 취하는 싱거운 대결 구도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그냥 아무런 함의를 내포하지 않는 소동일 뿐이다. 누가 더 센 욕을 해서 상대를 제압하는지가 중요한 욕 배틀만 봐도, 여기서는 끝없는 뱉어냄만 있을 뿐 뱉어낸 그 무엇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분열의 양상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수지의 얼굴에 상처를 낸 그 소녀가 어떤 억압과 분노로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본드를 하고 그토록 음산한 표정을 짓게 되었는지, ‘써니’ 밖에서 서성대는 그녀의 트라우마가 궁금하다. 그러나 영화는 그 소녀에게 쓸 마음이 없다.

주먹은 모두 같다고?

<써니>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면은 알려졌듯, 당시 전경과 시위대의 대치상황 속에서 소녀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순간이다. 비판의 초점은 그 시대적 투쟁에 감히 그런 경쾌한 음악을 깔고 그도 모자라 소녀들의 한갓 패싸움와 동질화했다는데 맞춰지는 것 같다. 그런데 잠깐. 만약 그 장면을 <말죽거리 잔혹사>의 남자 학생들, 아니, <써니>와 분위기가 더 유사한 <품행제로>의 소년들이 채웠다고 가정해보자. 그때도 동일한 비판이 가해질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소년들의 학창 시절을 다룬 영화들에서 폭력이라는 클리셰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그리고 장르적 성격을 떠나, 일단 그것은 강력한 아버지의 권력에 대한 저항과 그 권력을 선취하고 싶은 욕망 사이의 분열 혹은 제도와 세상과의 불화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인지되어왔다. 그들에게 학교는 수컷들의 암투가 벌어지는 학교 밖 사회의 축소판이다. 만약 이 소년들의 패싸움이 그곳에서, 그런 배경에서 벌어진다면 눈 밝은 관객에게는 위와 같은 맥락으로 여전히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또 그만큼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가 소년들의 패싸움을 굳이 그런 정황 속에 위치시킨 어떤 상징적 이유에 대해 우리는 말할지 모른다. 나는 지금, 남자들의 성장영화가 더 우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소년들의 성장기를 지탱하는 관습화된 코드가 소녀들의 이야기에는 아직 뚜렷하지 않을 때, 혹은 소녀들의 성장기에는 그런 관습화된 코드 자체가 불가능할 때, 영화가 시대적 상징들과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개별 소녀들의 삶 사이에서 무엇을 꺼낼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위의 그 문제의 장면에서 소녀들의 패싸움이 두드러진 이유는, 이들이 성인이 아닌, 아이라서가 아니다. 소년처럼 사회적 맥락 안에서 추상화되지 않거나, 추상화된 적 없는 소녀라는 특수성, 혹은 이질성이 역사의 상징적 사건과 부딪혔을 때의 영화적 의미를 이 영화는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잘못 판단하고 있다. 그 결과 이 장면에서 소녀들의 그 이질성은 유아적인 방식으로 신비화, 낭만화된다. 한쪽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유치한 코미디가 되는데, 그와 섞인 다른 한쪽(시위대와 전경)이 어떻게 독립적인 의미의 영화적 활동을 진행할 수 있겠는가. 소녀들의 눈에는 전경과 시위대의 싸움이 자기들과 똑같은 패싸움으로 보였을 거라고, 만약 강형철이 소녀들의 시선으로부터 한발 떨어져 그걸 부조리한 유머라고 말한다면(801호), 나는 그가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 장면이 <록키4>가 걸린 극장 앞에서 일어난다는 지적에 대해, “그 영화 자체가 주먹 쓰는 주인공이 등장하니 난투장면과 병치시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대답의 이면을 물고 늘어지고 싶다. 그 세 가지 종류의 주먹들을 맥락을 떼고 영화적으로 공평하게 전시하는 것이 부조리의 유머라면 그 유머의 정체는 무엇인가. 적대가 제거된 부조리의 형상이라는게 과연 존재할 수는 있는 것인가. 감독이, 그건 내가 아닌 인물의 시점이라고 유난히 강조할 때, 우리는 묻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인물의 시점으로 결국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고 싶었나요? 이건 장면의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 이전의 물음이다. 나는 그 답을 이 장면에서 찾지 못했다.

평등의 강박을 해소하는 이상한 방법

<써니>에 쏟아지는 일관된 칭찬 중 하나는, 스타배우 없이도 과거와 현재의 아귀가 딱 들어맞는 적절한 캐스팅에 대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얼굴과 성격이 성인이 된 뒤의 그것들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찾아보는 일은 물론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영화가 아역과 성인 역을 맡은 배우들이 어떻게 서로를 모방하고 있는지와 관련된, 어떻게 보면 이야기의 외적인 영역으로 관객의 호기심만 겨냥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런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그렇게 상처를 입고 사라진 수지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를 궁금해하기보다 아름다웠던 수지(실은 민효린)는 현재 어떤 모습일까(실은 누가 연기할까), 를 알고 싶어한다. 혹은 그렇게 맛있게 욕을 잘하던 진희가 내숭을 떨며 부잣집 마나님이 되어 등장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진희의 입에서 어린 시절의 실력이 나오기만 기다린다. 이 영화는 거리낌없이 그런 기대를 전략으로 삼고 있고, 관객 역시 그걸 영화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이 아이는 현재 누구의 어린 시절일까요’를 궁리하는 인물 맞히기 게임이 아니다. 25년이 흘렀어도 까보면 그 시간이 단절시키지 못하는 연속성이 인물들의 겉모습이나 성격에 그대로 묻어난다는 것, 그러니까 순수한 본질만은 그대로라는 걸 보여주는 데 이 영화는 몰두한다. 흔히 우리가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에게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꺼내는 상투어, “너 참 그대로다”라는 말을 <써니>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삼는다. 물론 그 이데올로기는 보수적으로 기능한다. 두개의 예. 아리따운 미장원 집 딸 복희가 술집 접대부가 되었을 때, 즉 삶의 물질적 조건이 완전히 달라졌음에도, 영화가 그녀는 그래도 그대로다, 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을 말하지 않기 위한 것인가. 다 큰 애 엄마들이 딸을 왕따시키는 딸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그것도 딸의 교복을 입고 떼로 몰려가서 어릴 때 하던 짓 그대로 집단 폭력을 휘두르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상황인가.

<써니>가 과거 소녀들의 가정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이후 이들의 25년의 삶을 제시하지 않은 걸 문제삼기보다 그걸 별로 궁금하지 않게 만든 의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평등의 강박이 있다. 어린 시절의 사심없던 관계가 어른이 되어서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계급적인 평등’이 필요하다고 영화는 생각한다. 거기까지는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이 평등의 강박을 몹시 불평등한 방식으로 해소한다. 우정의 공동체가 존속되기 위해서 중요한 건 공동체 밖 타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써니’에게 그 타자는 또래 날라리 집단이었고, 나는 그 표피적인 적을 둘러싼 한계에 대해 위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성인이 되어 뿔뿔이 흩어진 언니들을 다시 모아 우정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타자가 필요할까. 이제 이들이 뭉쳐 싸울 공통의 적은 없다. 혹은 이들은 공통의 적을 두고 싸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술집 접대부 복희와 가난한 주부 금옥, 그리고 강남의 사모님 나미 각각이 놓인 토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지난 25년의 현실을 모두 감안하고서는 도저히 어린 시절의 관계는 복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그 시간이 마치 없었다는 듯이 구는 편을 택하며, 춘화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등장시켜서 불행한 친구들에게 유사한 삶의 수준을 부여한다. 이 자선의 행위와 그걸 한치의 고민없이 수용하는 건 다른 건 몰라도 성장은 아니다. 그러니 어른 ‘써니’가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건 현실(의 적대)의 침입을 당하지 않는 평등의 환상이다. 달리 말해 단 한치의 성장도 거부하는, 25년이 흘러 온갖 상처를 입었으나 과거 그 자리, 그대로 세월의 풍파를 맞지 않은 척 연기하는 우정. 이런 병적인 우정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위로를 준다는 걸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누군가 이것이 여자들의 역사라고 믿을까봐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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