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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누구나 이 세상에 수십편의 영화를 남기지
김혜리 2011-06-03

본인의 모습이 잡힌 CCTV 영상을 수집해 만든 오스트리아 작가 마누 룩스의 비디오아트 <지워진 얼굴>(Faceless).

5월13일

2주 뒤 내한할 이자벨 위페르를 기다리며 틈틈이 그녀의 영화를 본다.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레이스 뜨는 여인>(La Dentelliere, 1977)을 DVD 플레이어에 넣으며 긴장했다. 한때 내게 진한 자국을 남긴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은 작은 용기를 요한다. 비유하자면 헤어진 애인과 차를 마시는 기분과 비슷하다. <레이스 뜨는 여인>에서 순진무구한 처녀 폼므로 분한 위페르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으로부터 곧장 걸어나온 것 같다. 촉수 같은 솜털로 뒤덮여 있으며, 몸의 모든 모서리는 완만하게 둥글려져 있다. 그녀는 지적으로 완전한 백지 상태인 채, 충만해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갈 무렵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뒤 마음이 깊이 병들어 요양소에 수용된 폼므가 뜨개질을 하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어 관객을 응시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 신의 배경은 분명히 붉은 낙엽이 뒤덮인 요양원 벤치였고 앵글은 정면, 사이즈는 미디엄 롱숏이었다. 쏟아지던 가을 햇볕의 각도와 폼므의 얼굴에 레이스 무늬를 내던 나뭇잎 그림자까지 아직 생생하다. 그런데 다시 확인한 영화에서 폼므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구내식당 의자에서 몸을 틀어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홧속인가? 내게 입력된 세세한 이미지는 과연 어디서 왔을까. 그것이 연원한 ‘장소’를 발견한다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진실을 알게 될 것 같다. 그나저나 이러다간, 앙드레 말로가 말한 ‘상상의 미술관’과는 다른 의미로 ‘상상의 영화관’을 따로 지어야 할 판국이다.

5월14일

‘파운드 푸티지 필름’(Found Footage Film)은, 기성 영화(들)의 조각을 재조립하고 충돌시켜 만든 영화를 가리킨다. 서울 코리아나 미술관은 5월 말일까지 <피처링 시네마>(Featuring Cinema)라는 이름 아래 10점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을 전시 중이다. 구경해보니 영화와 영화 사이, 혹은 영화적 이미지들 사이에 신작로를 뚫고 다리를 놓는 재편집 작업이 대종이다. 예컨대 임민욱의 <희생-점프컷>은 타르코프스키의 142분에 달하는 영화를 ‘짐짓’ 우악스러운 손길로 8분으로 압축한 작업이고, 노재운의 <God4Saken>은 49개의 색면을 고전 필름 누아르에서 가려 뽑은 마흔아홉개 신으로 통하는 인터페이스로 설계한 작품이다. 특정 모티브에 대한 콜라주 작업도 여럿인데, 예를 들어 크리스토프 지라르데와 마티아스 뮐러의 <크리스탈>은 거울이 오브제로 등장하는 영화 장면을 조합해 자아도취와 분열증, 사랑과 파괴에 관한 이야기를 연출하고 있다. 잠깐. 연출이라고? 이것은 편집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아티스트들은 영화의 원작자들과 저작권에 대해 어떤 합의를 보고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배명지 큐레이터에게 문의하니, 새로운 창작 작업으로 간주될 경우 법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나라도 있고, 대개는 ‘예술가끼리의 암묵적 양해’가 성립된다고 한다. 비디오 아트의 경우 오브제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이 구매 소장하는 일이 드물어 상업적 이익을 취했다고 판단하기 애매하다는 점도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순전히 관객 입장에서 말한다면, 하나의 작품이 무슨 유기체인 양 다른 작품의 영감으로 환생하고 이리저리 물꼬를 트며 세상 속을 흘러다니는 광경은 확실히 즐거운 구경거리다. 그런데 이를 가능케 하는 예술가끼리의 양해에서 관건은 법적 판단이 아니라 재창작이 나의 작품을 존중했는지에 관한 미학적 판단일 터다. 존경이나 예찬이 아니라, 존중이다. 당신이 감독이라면 어떤 경우에 존중받았다고 느낄까? 현실적으로는 딴 거 다 필요없고, 결국 내 영화를 인용한 그 작품 자체가 예술적으로 얼마나 훌륭한지로 모아지지 않겠는가?

전시작품 가운데 오스트리아 작가 마누 룩스의 <지워진 얼굴>이 도드라졌다. 그녀는 본인의 모습이 포착된 CCTV 영상을 수집한 다음 군중의 얼굴은 동그라미로 죄다 지워버리고 자기만 얼굴 있는 시민으로 등장하는 일종의 미래 영화를 만들었다. 사생활과 초상권 보호 차원에서 어차피 넘어서야 할 과정을 거꾸로 이용한 아이디어다. 미술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퉁이 곳곳에 부착된 CCTV 카메라에 일부러 한번씩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었다. 그러니까 누구나 이 세상에 수십편의 영화를 남기고 가는 거다. 영원히 편집되지 않을 뿐.

5월16일

오전 9시40분. 왕십리 한 멀티플렉스에 <쿵푸팬더2> 시사를 보러온 잠이 덜 깬 기자들을 대상으로 J. J. 에이브럼스 감독의 <슈퍼 8> 중 20분 분량 클립이 상영됐다. 서두에 J. J. 에이브럼스가 몸소 등장해 영화 제작과정을 간략히 소개하는데 어르고 메치는 프레젠테이션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DVD에 등장해 재치로 넋을 홀랑 빼는 픽사 사람들과 견줄 만하다. 선보인 20분 분량에 의하면 <슈퍼 8>의 원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야구 캠프 대신 동네 친구들과 슈퍼8 필름으로 영화를 찍으며 여름방학을 보낸 70년대 영화 키드들의 추억이고 둘째는 <클로버필드>풍의 괴수호러다. 후자가 3D 스펙터클을 위해 동여맨 봇짐처럼 겉돌지 않을 수 있을까가 영화의 갈림길이 되겠다.

오늘 시연된 <슈퍼 8> 클립에는 좋은 배우의 위력을 예시하는 예쁜 장면이 있었다. 엉성한 장비를 들고 밤 촬영에 나선 소년들은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부부의 대화신을 리허설한다. 감독은 허둥대고 기계는 말썽을 부리고 남자주인공은 뻣뻣하다. 그런데 급히 섭외해온 동네 소녀 앨리스(엘르 패닝)가 이 어설픈 카오스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진짜배기 연기를 보여준다. 일순 시간이 멈추고 누군가의 첫사랑이 시작되는 소리가 바스락 들린다. 앨리스는 급기야 통나무 같았던 상대역으로부터도 호연을 끌어낸다. 소년이 “나도 널 사랑해”라고 떨며 말할 때 극중 소년도 관객도 그것이 연기인지 진짜 고백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유능한 배우는, 용한 지압사처럼 상대방의 위장 안에 뭉쳐 있던 감정의 혈을 풀어 진실이 바깥으로 순연히 흘러나오게 한다.

5월17일

어제 <쿵푸팬더2>와 오늘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를 보고 난 감상을 나란히 놓아보니 교집합이 크다. 기본적으로 판다 포(잭 블랙)와 잭 스패로우 선장(조니 뎁)은 허당 영웅들이다. 액션을 주요한 재미로 약속하는 기획들이지만 둘은 액션 히어로가 아니다. 포의 최대 위력은 몸이 푹신하다는 점에 있고 잭 스패로우의 무기는 아슬아슬하게 뒤뚱뒤뚱 공격을 피해가는 재주에 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건, 기껏 최후통첩을 했는데 거리가 멀어서 악당이 못 알아듣는다거나 선장인 주제에 다른 선원들에게 마구 무시당하는 순간이다. 두 속편 블록버스터는 1편부터 진작에 설정된 캐릭터를 이용한 농담에서는 의도한 웃음을 주고 있지만, 이번 편의 이야기를 가동하기 위해 새로 지어낸 인물의 갈등과 플롯은 전혀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영웅의 아버지나 2세가 등장한다거나(<인디애나 존스> 유형) 가짜가 출현한다거나(<슈퍼맨> <배트맨> 유형) 하는 설정은 익히 아는 교본대로라 심심하다. 한편 영원한 젊음의 샘을 둘러싸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의 이야기는, 아주 복잡한데 관객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종류의 플롯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두 영화의 재미는 고정된 요소에서 나온다. 끊임없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두 영화가 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다.

3D영화에서 몰입을 훼방놓는 요소는 여럿 꼽을 수 있겠으나 그중 최악의 장애는 가장 앞쪽 평면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자막이다. 스크린 외곽으로 자막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쓸데없이 궁리하다가 매번 영화 초반 몇분은 집중에 실패하곤 한다. 제대로 된 한국어 3D영화가 나오면 자막이 주는 부담을 정확히 가늠해볼 수 있겠다.

사진제공 : 코리아나 미술관 스페이스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