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칸영화제 영화는 챙겨봤나?” “커버 촬영 컨셉은 어떻게 되나?” “결혼했나?” 등등. 스튜디오에 들어온 황정민은 이것저것 물어본다. 주로 영화홍보사 직원이나 매니저에게 물어보는 다른 배우들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부당거래>(2010), <평양성>(2011)에서 황정민과 함께 작업했던 정정훈 촬영감독은 그를 두고 “촬영현장에서 워낙 스탭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까닭에 그를 한번도 배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다만 찍어놓은 걸 보면 진짜 배우”라고 말하기도. 이런 황정민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기자의 속성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전작 <부당거래>에서 국가 권력이 주도하는 음모 한가운데에 있는, 속내를 알기 어려운 최철기 형사를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긴 황정민이 기자가 되어 돌아왔다. <모비딕>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1994년 서울 인근에 있는 발암교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 사건을 성효관(김민희), 손진기(김상호) 등 동료기자와 함께 취재하는 이방우 기자다. 그는 특종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노련한 기자인데, 이는 인물의 본질을 향해 파고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배우 황정민과 겹치는 모습이다. 그런 그가 변했다. “40대가 되면서 연기를 좀더 편하게 대하는 것 같다.”
-(전자담배를 피우는 황정민을 보고) 담배는 왜 끊었나.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했는데… 피우다 안 피우다 한다. 평소에는 안 피우는데….
-개봉(6월9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부담되나. =부담감은 없다. 부담 가져봐야 뭐 하겠나. 부담 가진다고 해서 영화가 잘되는 것도 아니고 나만 힘든 건데. 조금 조심스러운 건 있다. 데뷔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때 어떻게 했더라 하는 생각을 늘 한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처음과 지금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도 하고. 물론 사람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떻게 변하는지가 중요한데,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진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오감도> 등에서 함께 연기하고, 차기작 <댄싱퀸>에서 부부로 출연하는 엄정화의 <마마>와 극장에서 비슷한 시기에 격돌한다. =(엄정화는) 친한 친구다. <마마>는 울고 그러는 건데 왜 지금 개봉해? 원래 개봉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제 <마마> VIP 시사회가 있었는데 다른 인터뷰를 하느라 못 갔다. 이제 정화는 경쟁자인데, 누가 이기나 한번 보자고 했다. (웃음)
-기자 역할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정직하지 못한 역할을 해오다가 처음으로 정직한 역을 맡았다고 했다. =역할보다 이야기의 짜임새가 좋았다. 그 다음이 주인공 이방우 캐릭터였다. 그가 40대 초반까지 사회부 기자로 뛰는 건 독고다이 기질이 있고, 사회부가 아닌 다른 부서의 팀장까지 했던 인물이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했다. 기자 시절, 김훈 소설가도 데스크를 본 뒤 기자로 복귀한 적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때 함께 일했던 후배 기자들이 김훈 작가를 어려워했다고 들었다. 어쨌거나 그런 경력이라면 독고다이, 하이에나 기질이 있다는 건데, 그게 매력적이었다.
-캐릭터를 구축하기 전 현직 기자들을 취재했다고 들었다. =영화의 배경이 1994년이다. 당시 평기자였던, 그러니까 지금은 언론사 사회부 부장들을 만나 기자에 관한 하나부터 열까지를 전부 물어봤다. 하루에 옷은 몇번 갈아입었는지, 편한 옷은 뭐였는지, 플러스펜이 아니면 글이 잘 안 써진다든지, 수첩은 어떤 종류였는지, 마감 분위기는 어땠는지, 당시 경찰청 기자실 분위기는 어땠는지, 담배는 하루에 얼마나 피웠는지, 사건 터지면 어떻게 취재했는지 등 디테일들을 수집했다. 다 듣고 나니 어떤 패턴으로 가면 되겠다는 게 자연스럽게 그려지더라.
-그런 과정이 관객에게 전형적인 기자로 보일 수 있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나. =전형적으로 보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전작인 <부당거래>에서 형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방우가 오히려 전형적인 기자처럼 보이는 게 나에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히 오버해서 관객에게 ‘기자야? 형사야? 도대체 뭐야?’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낫다. 이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시나리오에 욕도 있었는데 감독님께 말씀드려서 다 뺐다. 아무래도 기자니까 귀티나 배운 태가 났으면 했다. 욕을 안 하더라도 그 느낌만 전달하자고.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거라고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야기의 어떤 면이 재미있었나. =흥미로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을 잘 들여다보면 진실이 있다식의 미스터리, 음모론 소설을 좋아한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도 재미있게 봤고. 사실은 아닌데 실제로 일어날 것 같은 이야기들 있잖나. 무엇보다 <모비딕>은 이야기의 구조가 잘 짜여 있었다. 이건 내가 굳이 연기를 할 필요없이 흐름을 잘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전작 <부당거래>에서 연기한 최철기 형사는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반면, <모비딕>의 이방우는 원하는 게 분명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특종뿐이다. =이방우는 동료 기자인 성효관, 손진기를 이끄는 팀의 리더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머릿속에 있는 걸 그대로 말해야 하는 스타일인데, 배우로서 연기하기가 편했다. 그냥 행동하고 말하면 된다. <부당거래>의 최철기는 표현을 잘 안 한다. 그게 연기하기가 더 어렵지만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게 있다.
-지난해 <부당거래>는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그 점에서 <부당거래>는 배우 황정민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작품인가. =코언 형제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1)를 좋아한다. 극중 조지 클루니를 보면 연기를 전혀 안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잘 표현한다. 그걸 보고 질투를 한 기억이 난다. 나는 인상 써가면서 연기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부당거래>를 하면서 나도 저런 연기가 되는구나, 저렇게 연기할 수 있구나, 나한테도 저런 느낌이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앞으로 해야 할 작품이 많지만 ‘연기를 안 하는 연기’를 해야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부당거래>에서 류승범이 연기한 검사 주양의 대사 중 “밥상에 숟가락 얹었을 뿐인데”라는 시상식 발언을 패러디한 대사가 있는데, 어땠나. =솔직히 그 대사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이 대사를 하면 관객이 웃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이 대사를 위트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잘 쌓아온 인물들의 감정이 무너질까봐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관객이 진짜 위트로 받아들이더라.
-과거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빨리 40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제 40대인데, 30대였을 때 했던 연기와 뭐가 다른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좀더 진중해졌고, 배우가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재미있게 하는 건 있다. 편하다. 그러니까 막 할 수 있는 거지. 눈치 보는 것도 없고. 안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편한 것도 있고. 40대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고등학생 때부터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막상 40대가 되고 나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물론 20, 30대 때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연기가 내 삶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배우로서 또 한 단계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짧다면 짧고 길면 긴 70, 80살까지 살 수 있는데, 세상의 무수히 많은 직업 중 유독 연기 하나만 생각하면서 살면 재미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연기를 천직으로 삼고 살겠다는 다른 배우들은 배부른 생각이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 많은 직업 중 황정민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이 있을 텐데 배우 하나만 생각하는 건 조금 반대다. 지금은 그렇다.
-그간 자신이 했던 역할 중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을 최고로 꼽은 적이 있다. 이는 아직도 유효한가. =<부당거래>를 하고 나서 변하고 있다.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은 내 주위에서 볼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인데, 저런 느낌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우려를 많이 했는데 해보니까 괜찮더라. 자신감을 많이 얻은 캐릭터였다. <부당거래>의 최철기 형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날 너무 잘 알잖아. 나 역시 최철기처럼 불같은 성격이긴 하나 즉각적이고 생각하는 건 바로 이야기해야 하고, 이야기가 끝나면 뒤끝이 전혀 없는 건 또 다르다. 그런데 해보니까 되더라.
-차기작은 위에서 언급한 <댄싱퀸>이다. 다음주에 크랭크인한다고. =서울시장 후보가 되기 위해 당 경선에 참여하는 남편과 그런 남편 몰래 댄스가수에 도전하는 아내(엄정화)를 그린 코미디물이다. 극중 서울시장 후보에 도전하는 가난한 변호사를 연기한다. 서울시장 후보가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서울시장 황정민, 상상이 잘 안된다고? 왜 상상이 안돼. 그냥 하면 되지.
-기자 역할도 해봤는데 이참에 <씨네21> 기자로서 다른 배우를 인터뷰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있다. 진짜 잘할 수 있다. 배우니까 이야기를 제대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상대 배우가 나와 인터뷰하려고 할까? 나중에 진짜 전화하겠다고? 그래. 대신 내가 글 쓰는 건 안된다. 인터뷰는 내가 하고 글은 <씨네21> 기자가 쓰고.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