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TView
[최지은의 TVIEW] 기죽지 않는 애정씨

<최고의 사랑> 구애정의 ‘더티 싼티’가 좋은 이유

MBC <최고의 사랑>

아마 평강 공주의 아버지도 몰랐을 것이다. “계속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는 엄포가 정말로 평강 공주와 온달을 결혼에 이르게 할 줄은. 아마 우리 아버지도 모르셨을 것이다. 수학 공식은 지지리도 못 외우면서 연예인 누가 누구랑 사귀고, 누가 인기가 많고, 누가 어디에 출연했는지는 쓸데없이 줄줄 꿰고 있던 고등학생 시절의 내가 못마땅해 “그러다 나중에 연예부 기자될래?”라고 하셨던 말씀이 현실이 될 줄이야.

그래서 어쩌다 보니 방송과 엔터테인먼트 업계 언저리를 떠돌며 일하고 있지만 사실, 기자가 되기 전까지 나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내가 항상 궁금했던 것은 ‘연예계’라는 세계였다. TV로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알고 싶었다. 세상일이 다 그렇겠지만 보이는 것과는 다른, 완성된 결과물 뒤에 숨은 이면들이 나에겐 무엇보다 재미있는 소설이자 드라마였다.

로맨스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으면서도 요즘 내가 MBC <최고의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은 사실 그 때문이다. “우리 국보소녀 네명, 영원히 안 헤어지고 쭉 함께할게요”라던 약속이 무색하게, 찬란했던 시절이 반짝 지나간 뒤 남은 것은 비호감 이미지뿐인 구애정(공효진)은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의 주준영(송혜교) 이후 가장 공감 가는 드라마 여주인공이다. 방송이 ‘자아실현’의 창구가 아니라 ‘직업’이 되어버린 서른한살의 여자에게 노동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자장면 한 그릇을 다 비우는 것이다. 행사 뛰러간 나이트클럽 대기실에서 은박지에 싼 김밥을 꾸역꾸역 밀어넣고, 섹시댄스를 ‘섹시하게’가 아니라 ‘웃기게’ 춰야 한다며 “그래야 편집이 안되죠”라고 마음을 다지는 구애정은 자기 연민에 빠지는 대신 일상을 묵묵하고 성실하게 살아나간다. 명색이 연예인이지만 누굴 만나도 일단 친절하게, 살짝 비굴할 만큼 사근사근하게 구는 구애정의 태도에서는 취직 뒤 먹고살기 위해 불같던 성질머리를 한풀씩 꺾고 사는 내 또래 수많은 여성 직장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비롯해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경력을 살려, <세바퀴> <커플 메이킹> 등 방송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홍정은, 홍미란 작가의 노련한 구성은 이 드라마의 독보적인 묘미이기도 하다. 아이돌 그룹에서 ‘센터’와 나머지 멤버간의 관계, ‘급’에 따라 갈리는 협찬 의상, 사람보다는 방송이 우선인 ‘업계’의 분위기는 흥미로운 픽션인 동시에 차가운 현실이다. 교통사고를 낸 건 톱스타 독고진(차승원)인데 비호감이 되는 쪽은 한물간 연예인인 구애정인, ‘발목녀’와 ‘난동녀’라는 별명과 함께 간신히 쌓아온 커리어가 한순간에 날아가버리기도 하는 세계에서 구애정은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 다수 대중의 악의와 맞서 살아남아야 한다. 매체가 하루아침에 한 연예인을 ‘찌질이’나 ‘진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볼 때마다, 누군가가 연예인의 사소한 과오에도 “쟤는 평생 방송에 못 나오게 해야 돼”라고 단언할 때마다 내가 느꼈던 스산함이 그에게는 일상을 짓누르는 무게일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더티 싼티’ 구애정은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살고 있다. 거만하고 뻔뻔하지만 빌어먹게도 매력적인 독고진이 백마 탄 왕자가 되어 구해주러 오길 기대하는 대신 자신 앞에 놓인 구질구질한 기회를 간절히 붙들고, 고작 게임의 1회전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우승자가 된 것처럼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정말이지 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하루쯤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