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시네마 나우
[유운성의 시네마나우] 매우 특수한 ‘독일적’ 영화들

울리히 쾰러의 신작 <수면병>을 비롯한 베를린파 영화들에 주목하다

201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울리히 쾰러 감독.

바이마르공화국 시기(1919~33)에 일찌감치 황금기를 맞이했던 독일영화는, 이후 뉴저먼시네마의 도래와 더불어 짧은 부흥기를 맛본 이후론 20년이 넘게 국제적으로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사정이 좀 달라진 건 세기가 바뀌고 나서다. <굿바이 레닌>(2003)이나 <타인의 삶>(2006) 같은 ‘히트작’이 나온 덕택이기도 하겠지만, 세계 평단이 다시 독일영화에 눈을 돌리게 된 건 아무래도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일군의 독특한 영화감독들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독일 평론가들이 명명한 ‘베를린파’(Berliner Schule)에 속하는 감독들로는, 독일영화텔레비전아카데미(DFFB) 출신인 1세대, 즉 앙겔라 샤넬렉, 크리스티안 펫졸트, 토마스 아슬란을 비롯해 그들의 뒤를 이어 2세대라 불리는 울리히 쾰러, 발레스카 그리제바흐, 마렌 아데, 베냐민 하이젠베르크,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등이 있다. 나치, 비밀경찰, 통일, 이민자 문제 등 ‘큰 주제’를 다루어 최근 세계영화시장에서 제법 성공을 거둔 주류 독일영화들과 달리 이들 베를린파 영화들은 오늘날 독일인들의 일상적 삶의 미시적 관찰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일 누벨바그’란 표현을 쓴 프랑스 평단을 시작으로) 독일 바깥에서 서서히 인지되기 시작한 베를린파 영화들이, 통일 이후 독일사회에 대한 미시적 분석으로서 바이마르영화나 뉴저먼시네마에 필적할 만큼의 중요성을 띠고 영화사에 등재될 것인가는 시간을 두고 좀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2∼3년 동안 이들의 작업이 바야흐로 원숙기에 이르렀음을 추측게 하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는데, 예컨대 마렌 아데의 <에브리원 엘스>(2009), 베냐민 하이젠베르크의 <강도>(2010), 토마스 아슬란의 <그림자 속에서>(2010), 그리고 “베를린파 가운데서도 가장 퍼스널한 필름메이커”(마크 페란슨)로 꼽히는 울리히 쾰러의 세 번째 장편 <수면병>(2011) 등이 그것이다(이미 데뷔작 <방갈로>(2002)로 “베를린파 영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란 평을 끌어낸 바 있는 쾰러의 신작 <수면병>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서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과 더불어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유일한 영화였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수면병>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정글)과 클레르 드니(의 아프리카)를 뒤섞고 조셉 콘래드풍의 내러티브를 덧입힌 것 같은 영화지만, 자연의 숭고미라든가 정치적 함의가 개입될 여지를 용의주도하게 피해나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지배적 시점이 없이 복수화된 시점들이 교차되며, 밀도 높은 각각의 순간들이 고유의 비극적(undramatic) 긴장을 만들어내는 쾰러의 영화는, 아데의 <에브리원 엘스>와 더불어 베를린파의 미학이 지금껏 가장 섬세하게 구현된 작품이라 하겠다.

어떤 면에서 베를린파가 염두에 둔 것은 한때 이론적으로 논구되어왔던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기획을 모던한 내러티브영화에 탈정치적으로 재도입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쾰러는 다분히 아도르노적인 어조로 “예술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일상의 정치사회적 관심들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러하다. 예술의 힘은 그 자율성에 놓여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영화계에서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만큼 비평과 창작행위가 종종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매우 특수한 ‘독일적’ 상황에서 나온, 내러티브영화의 쇄신을 위한 기획이랄까. (다음에 계속)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