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예술판독기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모니터 액자에 갇힌 나르시시즘

1. 환경미화원 복장으로 선거운동하는 엄기영 전 앵커. 2. 클로징 멘트로 각인된 신경민 전 앵커. 3. 프로야구 시구자로 선정된 박은지 기상 캐스터. 4. 남성잡지 <맥심> 표지에 등장한 생전 송지선 아나운서.

직사각 틀에 관전할 내용물을 담는 점에서 TV 모니터는 네모진 액자에 담긴 고전 예술의 관람 논리를 반복하는데(799호), 그 틀 속에 등장하는 얼굴의 값은 실물가보다 배로 부풀게 마련이다. 특히 아나운서로 대표되는 방송인의 몸값은 시청자가 날로 부여하는 지성미와 품위의 부가가치 덕에 차원마저 다르다. 고학력 출신 엘리트라는 공중의 믿음은 신앙에 가깝다. 주중 정기적으로 동일 시간대에 네모진 TV 액자에 상반신 혹은 전신을 노출하는 방송인은 무릇 매스미디어의 총아다.

방송인은 외계의 소식을 단아하고 간결하게 옮기는 객관적 전달자지만 관전자는 전달된 뉴스의 내용만 보고 마는 법이 없다. 뉴스 매개자를 주관적으로 예의 주시하고 평가한다. 논조도 중요하지만 대중이 매기는 채점표는 호감 가는 마스크와 노출빈도에 의존한다. 그 점에서 대중연예인이나 정치인과 다를 바 없으며, 방송인 스스로 과대평가된 외부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때로 근거없는 자신감에 차기 쉽다. 몸값의 실상과 본분을 망각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나’로 약칭되고, 남성 연예인과 연인/부부로 발전하고, 프로야구 시구자로 선정되는 등 젊은 여성 방송인은 곧잘 예능인과 거의 대등한 반열에 올라선다. 그녀가 개인 사이트에 올린 얼짱 각도 사진 한장에 쏟아지는 네티즌의 신변잡기식 호응을 언론이 중계할 만큼. 모니터로 전달된 인상이 판단 기준의 전부인 점에서, 방송인의 품질을 잘 알지 못하는 건 방송인 당사자뿐 아니라 시청자도 마찬가지이다. 거물 방송인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신예가 등장하기 전까지, 또는 그 스스로 기대 밖 변절에 투항하기 전까지 알 도리가 전무하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자리를 탄탄히 잡은 예술’은 안정적 기조에서 벗어나길 포기하고 동어반복의 미학에 안주하며 권세를 누린다. 이로써 예술이길 자포자기하고 ‘유명 예술가’ 행세를 한다. 예술가의 인체를 작품 전면에 세우는 전략은 현대미술의 주요 경향이 되었다. 이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건 자기애(自己愛)의 개입이 작품 전달력에 기여하는 몫은 실로 크다. 작가의 나르시시즘을 향한 높은 수요가 관객과 비평가의 미감을 자극하니까. 인체 노출로 주목받은 미술인의 상당수는 여성이다. 메시지보다 몸이 관건이다.

전달할 내용보다 형식미에 명운을 건 방송인이나 예술인의 숙명은 고강도 노출의 압력에 떠밀려 추락하는 장면을 보여주곤 한다.

ps1. 전례없이 명쾌 통렬한 뉴스 마무리 멘트를 만나기 전까지, 10년 묵은 거물 아나운서의 안정적 아성은 지상 최고인 양 그릇 추앙되었다.

ps2. 방송과 대중은 스포츠 아나운서에게 미모와 몸매라는 소모적 가중치의 압력 수위를 높였고, 결국 허공에 던져진 그녀의 몸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