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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이성, 잃으면 대략난감

SBS 드라마 <시티헌터>의 참 공감하기 힘든 설정

SBS 드라마 <시티헌터>.

“이성을 잃는 순간, 내 집 앞마당에 설치해놓은 지뢰도 밟을 수 있는 거다.” 양아버지가 아들에게 비장한 얼굴로 삶을 가르친다. 그래, 이성을 잃었다간 그럴 수도 있을… 리가 없지. 앞마당에 지뢰를 깔고 사는 상식에 홀랑 넘어갈 뻔했네. 이 남자의 사고방식이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대통령 경호원으로 일하다 아웅산 테러를 경험하고 복수를 위해 공작원들을 데리고 북한에 잠입했으나 믿었던 조국의 배신,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 수뇌부 인사 ‘5인회’의 이기심 때문에 스무명의 동료를 아군의 총탄에 잃었다. 복수심이 극에 달할 법도 하다. 이 남자의 이름은 이진표(김상중). SBS 드라마 <시티헌터>에서 이윤성(이민호)을 키우는 양아버지다.

극단적인 일을 겪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식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고난을 겪게 하는 극적 장치는 운명이란 이름으로 널리,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리고 운명이란 단어의 무게만큼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 한마디도 철저한 인과율 안에 놓이며 이후 선악을 판단하는 단서가 된다. 운명에 맞서는 후대에겐 선대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할 시점이 온다.

이진표가 품은 복수심도 죽은 친구의 아들을 복수를 위한 장기말로 키우게 되는 당위가 되는데 비장하게 이를 행하는 이진표의 말과 행동이 몰상식하고 상당히 구차하기까지 하다. 죽은 친구의 아내에게서 아들을 훔치고 그 자리에 남긴 편지를 보자. ‘무열이는 죽었다. 아기는 내가 데려가서 잘 키우겠다. 새 출발해라. 넌 꼭 행복해야 한다.’ 빨래를 너느라 돌아선 2초 만에 아기를 도둑맞은 여자의 절규를 엿보며 행복을 비는 얼굴이 사뭇 비장하다. 장난하나. 어서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해!

강단있는 연기에 이지적인 마스크. 토요일 밤마다 ‘그것’을 알려주는 육하원칙의 남자 김상중이 어째서 이런 캐릭터가 되어버린 걸까. 친구의 죽음을 알리고 아이만 데려갔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가보다 할 텐데 사족처럼 붙은 ‘새 출발’은 또다시 의문을 낳는다. 만약 남자아기가 아닌 여자아기였어도 새 출발하라며 아이를 훔쳐갔을까? 데려가서 니키타처럼 키웠을까? 사적 복수를 위해 아이를 훔치면서도 행복하게 새 출발하라는 등 추잡한 사족을 덧붙이듯, 이 남자의 가슴에 자리잡은 조국과 애국은 남의 생을 쥐고 흔든 자가 응당 짊어져야 할 인과율을 흐리고 있다. 이진표는 “조국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는 있어도 정권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 없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복수는 조국을 위한 것이다. 또한 그는 동남아 오지에서 마약을 제조해 팔며 돈을 모으고 사병을 훈련시키며 “다른 덴 마약을 팔아도 한국엔 안된댔지”를 외치고 부하를 사살한다. 대단한 애국자 나셨다. 그의 조국관에는 나의 조국만 있을 뿐 타인의 조국이 없다.

안기부 특수작전부장이 북파공작원 21명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꼭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던(물론 지켜지지 않지만) 드라마 속 그의 ‘조국’은 대통령 딸의 경호원에게 “나는 총알받이다”를 복창하게 한다. 영화며 드라마 속에서 자주 ‘목숨값’을 외치는 것도 거북한데 거기에 애국과 조국이 개입해 값을 더하고 빼다 보니 목숨마다 값이 다르다. 나는 지금 사람이 이성을 잃었을 때의 폐해를 목도 중이다. 조국에 이성을 잃으면 내 집 앞마당에 지뢰를 설치하고 살거나, 자존심에 이성을 잃으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윤은혜)처럼 남의 집에서 집들이를 하게 된다. 더운 여름, 정신 꼭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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