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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앤더피플] 비운의 사나이 된 왕년의 ‘오빠’
안현진(LA 통신원) 2011-06-17

<브레이킹 인>(Breaking In)의 크리스천 슬레이터 (Christian Slater)

크리스천 슬레이터(오른쪽에서 두 번째).

출연하는 TV시리즈마다 방영 취소를 피하지 못하는 배우가 있다. <볼륨을 높여라> <트루 로맨스> 등에 출연하며 1990년대 스크린 속 청춘의 아이콘으로 꼽히던 크리스천 슬레이터가 그 불운의 주인공이다. 그는 조니 뎁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정말이다. 해마다 많으면 세편, 적어도 한편씩은 꼬박꼬박 주연급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었던 전성기를 보낸 뒤, 2000년대의 슬레이터는 <웨스트 윙> <앨리어스> 등의 TV시리즈 에피소드에 간간이 출연하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는 커리어를 시작했다. 하지만 슬슬 이마가 넓어지기 시작한 그에게 돌아온 역할은 주연급도 아니었고, 그의 이름이 흥행을 보증해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2008년, 슬레이터는 <NBC>의 <마이 오운 워스트 에너미>를 통해서 TV시리즈 고정 출연을 결심한다. 평범한 남자와 스파이의 이중생활을 하는 주인공의 혼란을 그려낸 드라마였다. 그러나 <마이 오운 워스트 에너미>는 9회 방영 뒤 방송사의 취소 결정에 따라 다음 시즌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2008년에도 크리스천 슬레이터의 TV행을 곱게 보는 시선은 없었다. <뉴욕매거진>은 스크린에서 식상한 얼굴이 안방극장에서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하냐는 삐딱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비평가들과 시청자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기에, <마이 오운 워스트 에너미>는 그저 시기를 잘못 만난 수많은 TV시리즈 중 하나로 기억됐다. 그 뒤 2010년, 그는 <ABC>의 <더 포가튼>이라는 새 시리즈의 주연을 맡았다. 미국 전역에 4만명에 달하는 신원불명인들의 신분을 찾아내는 형사들에 대한 드라마였는데, 역시 17개 에피소드가 방영된 뒤 막을 내리는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2011년 봄, 슬레이터는 <폭스>의 새 코미디 <브레이킹 인>으로 세 번째 타석에 섰다. 전직 소매치기, 천재 해커, 사기꾼 등 전문인력을 고용한 최첨단 보안전문업체의 사장 오즈로 출연하는 그를 향한 동정론이 슬슬 일던 즈음이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브레이킹 인> 역시 7회 방영을 끝으로 취소되었다. <마이 오운 워스트 에너미>는 물론 <더 포가튼> <브레이킹 인>까지 모두 대박은 아니었어도 소소한 재미는 있었기에, 여론은 연이은 패인을 크리스천 슬레이터의 불운으로 몰아가는 중이다.

사실 보는 시각에 따라 크리스천 슬레이터의 불운은 행운으로 읽을 수 있다. 영화 못지않게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 바로 TV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이른바 ‘엘리베이터 피칭’(엘리베이터를 타는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진행되는 프레젠테이션)이라고 불리는 한줄 시놉시스는 한해 평균 500건이 제출되는데, 방송사에서 스크립트 작성을 허락하는 경우는 그중 70건에 불과하다. 여름이 시작되는 5월부터 작업에 들어가 그해 크리스마스 즈음 스크립트가 모이면 또다시 심사를 거쳐 그중 20건에 파일럿 촬영의 기회가 주어진다. 전쟁은 그때부터다. 이듬해 5월까지 캐스팅에서부터 촬영, 편집까지 모두 완성돼야 한다. 하지만 그 완성된 파일럿 20편 중에서 시리즈로 발탁되어 방송을 시작하는 건 많으면 8편, 적으면 4편이다. 그리고 무사히 살아남아 두 번째 시즌을 약속받는 경우는 방송사마다 한두편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비운의 사나이 크리스천 슬레이터가 출연한 TV시리즈 3편은 그나마 500:4라는 좁은 문을 지나온 운 좋은 경우였다는 것. 공중파 삼진아웃이라고 케이블 채널로 가라는 법도 없지만, 칠전팔기를 응원하자니 슬레이터 아저씨의 어깨가 왠지 힘겨워 보인다. 그렇다고 그만 나오시라는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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