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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권력의 경비병으로 전락한 영웅의 초상

<그때 그사람들>의 이순신 장군 동상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68년 4월27일에 세워졌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은 경제개발계획이 본궤도에 오르자, 각종 문화정책을 거푸집 삼아 ‘근대화된 조국’의 형상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는 이 동상은 이런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그 시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깨달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음속 한복판에 충무공의 동상 하나쯤은 세워두고 있었다. 임상수 감독의 2005년작 <그때 그사람들>은 한 장면에서 이 동상에 주목한다. 영화 초반부, 카메라는 이순신 동상을 앞에 두고 느리게 옆으로 이동하며 청와대를 향해 날아가는 헬리콥터들을 잡는다. 그런데 이 장면, 뭔가 이상하다.

잠깐, 바로 앞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헬리콥터 안이다. 대통령 일행이 앉아 있다. 비서실장이 창 너머를 힐끗 내려다본 뒤 먼저 말을 꺼낸다. “혁명 때만 해도 여기 다리 하나 없이 나룻배에, 온통 뻘밭에… 참 감개무량하시겠습니다.” 대통령은 비서실장의 아부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경호실 신 차장에게 사라진 물개 불알의 행방을 묻는다. “그래, 정 총리가 묵었다는 증거는 있고?” “뭐 증거야 없지만 사태는 뻔하니까요. 하여간 그분 대애단하세요.” 옆에서 히죽대던 경호실장이 거든다. “그게 그 인간 인생관 아니겠습니까? 한 세상 잠깐 사는 거, 맘껏 최대한 따먹는 게 장땡이다.” 비서실장도 끼어든다.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그냥, 에이, 끔찍한 사람.” 대통령은 약간 굳은 표정을 지으며 일본어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배꼽 아래 일은 원래 문제 삼는 게 아니야. 사나이가 시시하게….”

그런데 우리는 앞 장면에서 또 다른 ‘대애단한 분’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들은 바 있다. 어느 중년 여성으로부터 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새벽에 언뜻 깨보니 자기 몸을 쓰다듬고 계시더래요. 곱다, 정말 곱다, 이러시면서. 한없이 계속 온몸을. 그러다가 결국 어르신이 쟬 한번 다시 품어주시고…. 그 어른, 참 대애단하세요. 예에, 그 연세에.”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아랫도리 일을 문제 삼지 마라고 일갈하던 그분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두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독특한 목소리의 음색과 발성의 리듬감으로 외설스러운 말들의 몽타주를 만들어낸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 다음이다. 두명의 ‘대애단한’ 분들에 대한 뒷담화를 거쳐 당도한 세종로의 경관은 ‘물개 불알’의 강렬한 잔상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뒤틀린다. 세대의 헬리콥터만이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날아갈 뿐이다. 이 경관 속에서 충무공은 투구 앞창의 그림자에 눈을 감춘 채 부동자세로 서 있다. 국난 극복의 영웅이 아니라 권력의 경비병으로, 애처롭고 쓸쓸하게.

사진 : 한겨례 김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