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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상황을 은유하는 휴전선의 유령, 그 추상적인 존재 <풍산개>
김용언 2011-06-22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건 새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남자(윤계상)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3시간 안에 무엇이든 배달한다. 이름도 없고 전화도 없는 이 남자에게 연락하는 방법은 임진각에 쪽지를 남겨두는 것뿐이다. 어느 날 그에게 위험천만한 미션이 주어진다.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고위층 간부(김종수)의 애인 인옥(김규리)을 서울로 데려오라는 것. 두 사람은 휴전선을 넘는 과정에서 미묘한 감정을 나누게 되고, 이를 눈치챈 고위층 간부는 질투심에 휩싸인다. 이 삼각관계를 이용하려는 남한 요원들과 북한 요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위험한 계획을 세운다.

전재홍 감독의 전작 <아름답다>와 신작 <풍산개>는 모두 김기덕 감독의 원안에 기초하고 있다. 전혀 다른 소재지만 크게 보자면 두편 모두 한국사회에 끈적하게 내재된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육체와 영혼 모두를 파괴하는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상황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어떻게 불신과 증오의 유전자를 새겨놓는가. <아름답다>의 주인공 은영은 남자들의 광적인 집착을 불러오고, <풍산개>의 주인공 배달부는 사이렌 소리와 총과 폭탄을 몰고 다닌다.

<풍산개>의 배달부는 철거촌의 외딴 아지트에 스며들어 잠을 청하고, 임진각 주변에서 통곡하는 이산가족들을 말없이 지켜본다. 비상한 육체적 능력을 지닌 그는, 얼마든지 국가 권력과 손잡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이산가족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만 열중한다.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는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만 단 한번, 짐승 같은 절규를 터뜨린다. 휴전선으로 나뉜 분단 상황 자체를 은유하는 것 같은 유령, 그는 대단히 추상적인 존재다. 인옥의 말처럼 “동무의 피에서는 비린내가 나지 않아요”. 휴전선을 인육화한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윤계상은 그 추상성을, 표정과 몸짓만으로 관객에게 충분히 납득시키는 호연을 펼친다.

남북 분단이라는 소재만 들었을 때의 예상과 달리 <풍산개>는 그리 심각하게 인상 쓰는 영화가 아니다. 도리어 놀랄 만큼 웃기고 감정적으로 꽤 강렬한 드라마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지만 서로 사랑하게 된 배달부와 인옥의 절실한 감정선도 설득력이 있다. 대체 어떻게 처리할까 싶었던, 휴전선을 넘나드는 상황 역시 장대 하나로 가뿐하게 해결되며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상상하지 못했을 뿐 대체 왜 이게 불가능한가 싶은 설정 하나만으로도 <풍산개>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2010년 초 장훈 감독의 <의형제>가 버디무비와 액션스릴러에 남북문제를 성공적으로 끌어들인 것과는 또 미묘하게 다른 지점으로, 분단 상황에서만 가능한 기이한 유머가 돋보인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부분, 남북 대치 상황을 그대로 좁은 공간 안에 밀어넣는 시퀀스의 시작부터는 도리어 힘이 좀 빠진다. 남한 요원들이 탈북여성 접대부와 술을 마시고, 북한 요원들은 남한여성 접대부와 술을 마시는 부분부터 분단의 직유법이 노골적으로 이어지다보니 정작 좁은 아지트에 갇혀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선 다소 지치는 느낌이다. 그 뒤죽박죽의 순간을 전달하기 위해선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 이상의 밀도가 필요했을 것 같다. 저예산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아이디어만으로 끝까지 밀어붙이기가 버거웠을까. 12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액션, 멜로, 스릴러, 코미디 등의 장르를 빼곡하게 채워넣음으로써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하지만 하나의 강력한 설정에서 파생되는 변주들이 지나치게 오래 반복되는 탓에 그만큼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지 못한다. 호흡의 강약 배분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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