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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의 예술판독기] 보디 페인팅을 보는 모호한 감상법

동물을 인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PETA)전단.

의중에 뭐가 담겼건 보디 페인팅은 시각 호소력에서 극단을 달리는 표현체이다. 벗은 알몸과 채색 묘사가 공존한다. 상업광고나 절박한 의사를 전달하려는 집단이 보디 페인팅에 의존하는 이유는 보디 페인팅의 검증된 호객 능력 때문이다. 동물보호단체의 시위와 홍보물에 등장하는 동물 피부를 딴 보디 페인팅은 언어가 다른 동물의 의사를 대변하는 수단일 것이다. 집창촌 여성의 괴이한 얼굴 분장은 생존권 위협에 맞서는 결사의 다짐과 신분 은폐의 가면일 것이다. 전쟁터 군인의 안면에 올려진 위장은 구명을 목적으로 보디 페인팅이 복무하는 것이다. 보디 페인팅은 타협과 협박이라는 상반된 협상 카드를 쥐고 있다. 벗은 몸으로 다중의 시선을 일시에 끌어오되, 관음 대상인 벗은 몸을 채색으로 살짝 가린다. 이것 말고도 보디 페인팅의 이중성은 더 있다. ‘어느 선까지 알몸으로 봐야 하나’, ‘표현의 자유와 검열의 대립’ 따위의 대립적 쟁점을 던지기 때문이다. 응시하는 건 필시 알몸 같은데 성에 차지 않는 결핍감을 주는 알몸. 탈의와 착의 중간 어딘가에서 보디 페인팅은 은신한다. 축제용, 위장용, 시위용, 광고용 등 관여한 분야로 따지면 사진의 용도와 유사한데, 보디 페인팅을 순수 예술로 추대하기도 비예술로 하대하기도 하는 이중성마저 사진의 전력과 닮았다.

보디 페인팅의 역설은 알몸을 가시적으로 앞세워 결국 알몸을 가린다는 사실에 있다. 보디 페인팅의 ‘벌거벗은 임금님 효과’는 보는 자와 하는 자 사이의 암묵이 만든 것이다. 보고도 보지 못했다고 믿는. 그런 묵인의 배후에 보디 페인팅의 관건이 벗은 인체나 그 위에 그려진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뒤에 숨은 메시지라는 공감대가 놓인다. 즉 얼룩말 무늬를 피부에 올린 여체는 얼마나 얼룩말을 닮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얼룩말 사냥 반대라는 구호가 관건이다. 집창촌 여성의 귀신 분장을 읽는 지점도 생존 투쟁을 위해 귀신처럼 이승을 등질 필살의 결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중의 신중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작 수용자의 조건반사는 메시지도 재현 완성도도 아닌 캔버스-알몸을 주시한다. 수용자가 선호하는 대상이 내용물보다 포장지인 경우는 왕왕 있는 법 아닌가.

선명한 메시지 전달이 목적인 정치구호, 상업광고 등이 눈요기 포장지에 가려 제구실을 못하는 데 반해 순수예술은 모호성으로 인해 유리하고 영민한 위치에 있다. 1960년대 예술과 생활 사이의 이격된 거리를 좁히자는 취지로 사실주의 미술의 새 지평을 연 이브 클랭은 독창적인 파란색(IKB)을 내세워 자기 브랜드로 키웠다. 그러나 이브 클랭 하면 쉽게 연상되는 장면은 육감적 미모와 몸매의 여인 알몸에 파란 안료를 바른 뒤 몸 도장을 찍게 한 퍼포먼스다. 캔버스(알몸)도 안료 자국(작품)도 남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그것이 비판 사유가 되진 않는다. 덕분에 작품 제목 하난 거창하다. ‘청색시대의 인체 측정학’(Anthropometries of the Blue Peri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