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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자기 파괴의 예술

6월은 담배 전쟁의 달이었다. 금연 구역을 광장까지 확대한 남한은 과태료 부과로 관과 개인간 승강이가 보도되었고, 문구 경고가 아닌 사진 경고 삽입을 결정한 미 식품의약국(FDA)의 방침에 따라 2012년 하반기부터 목에 구멍 뚫린 남성, 까맣게 변색된 치아, 잿빛 폐와 건강한 폐가 나란히 대조된 사진 등 경고보다 협박에 가까운 흉악한 흡연 경고 사진을 미국 담배회사는 겉봉에 게재해야 한다.

담배만큼 기기묘묘한 대중 소비재도 없다. 명백한 유해성을 알고도 국가 수익을 창출한 장수 효자상품이다(전매청, 담배인삼공사 등 한국 담배 판매의 긴 역사는 관치였다). 제도교육 울타리를 벗어난 미성년에게 비공식 성년 인증 관문으로 제일 가시적인 효과는 ‘흡연하는 자아’의 모습이다. 합병증으로 잘린 발가락 사진 따위로 흡연을 협박하는 수위를 아무리 높여도 흡연 인구는 유의미하게 줄지 않는다. 자기 파괴의 권리를 주장하는 강력한 자의식과 흡연하는 자아가 중첩돼 보여서일까? 담배는 외관상 병기를 닮았다. 긴 연통 끝에 붙은 불과 연기, 잠재된 죽음의 메시지까지. 그럼에도 꾸준한 지지층을 거느린다.

한편 얼핏 흡연과 금연은 ‘중독. 쾌락. 개인주의 vs 통제. 건강.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양 보인다. 그러나 국민건강 보호와 세계적 추세를 따라 정부가 전개하는 금연 캠페인도 수출과 담배농가 보호를 이유로 형식적 단속에 머물 때가 많다. 서구 사례를 따라 경고 사진 삽입 법안이 2008년 발의되었지만 국회 서랍 속에 숙면 중이시다.

2011년 6월 경고 사진 삽입 결정이 발표되자 미국의 초국적 담배회사가 걸고 넘어간 문제는 ‘표현의 자유’ 침해였다. 개인의 선택권까지 관이 개입할 수 없다는 요지다. 어디서 자주 듣는 항변인데, 국가가 예술을 제압할 때 예술가와 지지자가 내놓는 항변과 닮았다. 담배나 (어떤)예술의 존재감은 관과 개인이 상호 합의한 타락의 묵인처럼 보인다. 파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권리를 행사하려는 욕망에 대한 묵인. 절대 엄금하는 마약을 대신해 양해한 중독의 상한선 같은 합의. 다만 중독성에서 예술이 담배의 영향력을 능가하지 못할 따름. 압도적인 끽연 인구가 곧 유권자인 담배시장 눈치를 살피는 정치는 금연의 선봉에 설 수 없다.

폭탄테러로 머리가 박살난 현장 사진들을 전면에 배치한 충격적인 현대미술도 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작품 앞에 다수 대중은 경악하고 소수 열광자는 모호한 성찰과 감동을 경험한다. 국가의 문화적 수준에 따라 이 작품은 19금 처리되기도 한다. 한편 기성 이미지의 차용(appropriation)이 미학적 유행이던 시절, 한 대표 미술인은 현대적 도시 풍경으로 자리를 굳힌 초국적 담배회사 말버러의 대형 광고판을 고스란히 찍어 제 작품으로 내놨고 반향은 컸다. ps. 필자는 비흡연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