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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주관적 폭력만이 문제는 아니잖아

<인 어 베러 월드>가 복수라는 폭력적 사슬을 그린 방식에 아쉬움이 있다면

<인 어 베러 월드>는 딴죽 걸기 힘든 영화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겠다는 선의로 가득한 이 영화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은 그리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다소 편협한 시선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고 싶다. <인 어 베러 월드>는 복수와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관용의 힘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꽤 매력적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또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비판했던 폭력적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나의 비판이 편협한 시선의 결과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 어 베러 월드>처럼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영화라면 편협한 관점이 더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차원의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복수와 더 나은 세상 사이에서

<인 어 베러 월드>의 원제인 ‘Haevnen’는 덴마크어로 ‘복수’라는 의미다. ‘복수’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복수의 주체는 항상 희생자(피해자)로 먼저 위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희생자에서 가해자로의 전환, 그것이 폭력적 복수의 주체가 단순한 폭력의 가해자와 구별되는 복잡한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되도록 한다. 실제로 수잔 비에르가 사건을 제시하는 방식은 먼저 폭력(육체적, 정신적)의 희생자를 보여준 뒤 그에 대응하여 인물들이 선택한 반작용의 행위를 보여주는 전략을 택한다. 영화의 원제와 영문 제목(그리고 국내 제목)인 ‘복수’와 ‘더 나은 세상’은 폭력의 희생자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복수’와 ‘더 나은 세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으며, 때문에 두 대상은 서사의 양극에 위치해 극적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한다. 즉, 분노와 폭력적 복수를 구현하는 크리스티안(윌리엄 요크 닐센)이 한편에 있고, 또 다른 한편에 관용과 비폭력의 세계를 대변하는 안톤(미카엘 페르스브란트)이 있다. 영화는 엔딩 무렵 크리스티앙을 안톤의 영역으로 끌어당겨 이상적 관용을 기반으로 하는 휴머니즘적 주제를 완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엔딩이 두 대상간의 긴장을 아주 매끄럽게 봉합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는 <인 어 베러 월드>가 폭력을 중지시키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게 더 강력한 폭력적 행위라는 현실적 이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부 극을 이끄는 것은 폭력의 피해자인 크리스티안과 엘리어스(마르쿠스 리가르드)가 어떻게 폭력을 중지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안톤의 아들이자 교내 왕따였던 엘리어스에게 가해지던 폭력을 더 잔혹한 폭력적 행위를 통해 중지시키는 데 성공한다. 어쩌면 안톤이 택한 관용과 비폭력의 방식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방식이다. 이 사건은 영화 중반 이후 자동차 정비공이 안톤의 뺨을 때린 사건에 서사의 자리를 양보하지만 크리스티안이 정비공에게 가하려는 복수가 학교에서 자신에게 행했던 폭력을 제압했던 방식을 되풀이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지된다.

<인 어 베러 월드>는 폭력을 통해 폭력을 중지시키는 현실적 행위에서 시작해서 관용을 통해 폭력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이상적 제스처로 전환한다. <인 어 베러 월드>가 자신의 주제를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있었다면 이는 이 두 세계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 달리 말해 이상적으로 여겨지기 쉬운 관용이라는 가치에 분노와 수치로 일그러지는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을 덧입히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다. 수잔 비에르는 폭력적 복수와 관용의 태도가 표면적으로 확연히 구별된다 해도 ‘분노’라는 동일한 모태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로 간주하려 한다. 안톤은 정비공에게 뺨을 맞은 이후 강물에 몸을 담가 수치와 분노를 다스린다(영화 곳곳에서 대립하는 두 대상 사이에서 진동하는 감정의 흔들림을 얼굴 위에 새기는 미카엘 페르스브란트의 연기는 무척 뛰어나다). 이러한 안톤의 모습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탈바꿈시키고, 그 분노를 소푸스와 정비공에 대한 폭력적 복수로, 그리고 엘리어스의 사고 이후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크리스티안의 감정적 상태와 멀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관용은 이러한 분노의 변이형이라 말할 수 있고, 그렇기에 관용은 분노가 폭력적 복수로 나아가려는 본성과 싸워 이겼을 때에야 가까스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 속에 사라진 구조적 폭력

<인 어 베러 월드>에서 폭력의 사슬을 끊은 것은 안톤이 아닌 엘리어스다. 엘리어스는 크리스티안의 폭력적 복수에 동참하고 이내 그 행위의 가해자이자 희생자가 된다. 달리 말해 자신의 가학적이고 폭력적 행위를 스스로가 떠안음으로써 또 다른 희생자가 가해자(복수)의 위치에 서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게 폭력의 사슬은 끊어진다. <인 어 베러 월드>의 엔딩은 복수라는 폭력적 사슬이 끊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충만하다. 이러한 결말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이 작품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차원의 폭력에 한정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 어 베러 월드>에서 두 대상 사이에 끼어 있는 인물의 딜레마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은 덴마크의 상류층 마을에서가 아니라 악마로 불리는 ‘빅맨’에게 안톤이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아프리카 난민촌 장면에서이다. 영화의 중심은 덴마크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지만 아프리카 난민촌의 에피소드는 ‘복수’와 ‘더 나은 세계’간의 갈등을 특수가 아닌 보편의 문제로 확장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표면적으로 덴마크 상류층 마을과 익명의 아프리카 난민촌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 있을 수밖에 없지만 수잔 비에르는 이 두 지역 모두에서 폭력의 희생자들이 자신들에게 향했던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의 유사성을 보여준 뒤, 그렇기에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선택 역시 동일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과연 이 두 지역이 대칭적으로 그려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덴마크 상류층 마을에서의 폭력의 사슬은 개인적, 주관적 차원에서 그려질 수도 있고, 더 나은 세상을 이루려는 발걸음을 개인의 윤리적 태도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익명의 아프리카 지역, 그렇기에 아프리카 전반의 보편적 상황으로 확장될 수 있는 그 지역이 직면한 폭력의 사슬 역시 동일한 성질의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덴마크의 상류층 마을과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아프리카를 유사한 보편성의 토대 위에 놓으려 할 때, 아프리카가 직면해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끝내 감춰지고 마는 것은 아닐까?

폭력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반군지도자를 악마 같은 인물로 추상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뒤따르는 문제가 있다. 저개발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아프리카 지역의 고통은 단지 악마 같은 악행의 주관적 폭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제1세계와 구조적 관계에서 비롯된 결과다. 아프리카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집단적 차원의 구조적 폭력을 누락한 채 개인적 차원의 폭력으로 넘어가기는 힘들다(이는 제3세계 국가 구성원에게 개인적 차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삶이 그만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만약 <인 어 베러 월드>가 개인의 삶에 작동하는 아프리카 사회 내부에 깊숙하게 자리한 구조적 폭력에 눈감거나 이를 거세하지 않았다면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폭력에 대해 동일한 관용의 태도를 요구할 수 있었을까? 폭력의 사슬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한 구조적 폭력이 만연한 그 지역을 경유하면서도 주관적, 개인적 폭력의 차원에만 머물려 하는 이 영화의 태도 속에는 또 다른 폭력이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닐까? 덴마크 상류층 마을이 아닌, 너무나 압도적인 구조적 폭력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리고 제3세계(그리고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까지도)에서 필요한 것은 안톤의 삶의 원리인가, “싸우지 않으면 애들은 내가 약한 줄 안다”고 말하던 크리스티안의 태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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