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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전체주의 페티시, 위험한 매력

세게 낙인찍힌 표지는 여간해선 뇌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한번 세게 찍힌 낙인은 중독성과 매력지수도 높단 의미. 20세기 초·중반 서유럽을 평정하려 한 파시스트 국가들의 시각적 표지들도 군중에게 높은 흡인력을 발휘했다. 파시스트가 고안한 표지는 20세기 중반 서유럽이라는 시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세기를 뛰어넘어 전세계에 비판적으로 인용되거나 문화적 코드로 차용되고 숭앙되었다.

설마 20세기 중반 현실 정치의 표지들이 차세대 문화 파생상품으로 변형되어 생존할 것을 전제로 고안되진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 중국 문화 혁명기의 홍위병의 표지도 서유럽 파시스트와 공통분모가 많다. 단정하고 절도있는 제복, 정치 신념의 화룡점정 격인 완장, 이 모두가 착용자의 과대망상과 카리스마를 배로 증폭시키는 장치였다. 비슷한 장치를 갈급하는 시공간에 차용되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다. 전체주의(쇼맨십)는 구성원 속 개인을 일체화된 군중, 즉 개인들의 총합에 종속시킬 때 완성된다. 자신만을 쳐다보는 수천 관객을 앞에 둔, 무대 위의 대중스타는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비유한 사회 통제자, 빅브러더에 필적하는 위치에 있다. 자연스레 전체주의 코드와 닮았고 그걸 강화할 장치들에 끌릴 공산도 크다. 현실 정치의 자장 안에서 파시즘의 표지는 전체주의 유산을 답습하려는 위정자나 낡은 정치적 판단에 낙인을 찍을 때 사용된다. 현실 정치인의 사진에 바코드 콧수염을 달아 풍자한 애드버스터의 정치적 디자인이나 스와스티카(나치 문장)가 붙은 제복을 포토숍으로 입혀, 부활한 거악으로 몰아세울 수 있다.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구시대 파시즘의 표지는 집요하니까.

반면 허구적 문화예술의 자장 안에서 등장한 파시즘의 표지는 논쟁을 자처한 쇼맨십이다. 이 역시 대중의 뇌리에 자리잡은 표지의 충격효과를 계산한 쇼맨십이고, 스테이지 카리스마가 강한 대중스타의 애용 액세서리로 둔갑한 것이다. 무대에 별도로 세워진 높은 연단 위에 올라 강론하듯 노래하는 마릴린 맨슨, 트레이드마크로 굳은 제복과 완장을 고수하는 마이클 잭슨. 구시대 전체주의 표지의 낙인은, 과거사의 실제 비극과 연관되어 충격 효과만큼 사상 논쟁도 유발한다. 변장 파티에 나치 문양 셔츠를 입고 참석한 영국 왕자 해리의 모습이 파파라치 카메라에 잡혀 곤욕을 치른 뒤 공식 사과까지 했다(해리의 나치 복장을 문제 삼은 황색지 <더 선>은 해리 왕자가 아프가니스탄 복무를 마치자 2008년 초 ‘영웅 해리 귀가하다’는 우호적 기사를 내보냄). 전체주의 시대 제복과 완장을 액세서리로 패용한 대중스타가 설마 나치의 극우파나 홍위병의 맹목주의 취향을 패션으로 투사했을 리는 없다. 토론 방송에 완장을 차고 출연한 신해철이 신나치주의 추종자일 턱도 없다. ‘아무 의미 없음’이 동시대 예술의 한 경향이 된 오늘날, 카리스마를 손쉽게 부풀릴 검증된 위험한 장식으로 패용한 것이리라. 평론가 수잔 손탁이 고정된 해석에 반대하면서 스타일을 주창한 이유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