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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운명 뒤에 숨지 마라

낭만타령이냐 비장미냐, MBC 드라마 <계백>

온라인 게임의 고 레벨 유저가 온갖 레어 아이템으로 치장한 듯 화려하기 그지없는 계백(이서진) 장군의 갑옷! MBC 드라마 <계백> 포스터 사진을 보고 얼마나 무변광대한 이야기를 하려나 미리부터 뜨악했네. 하지만 본편의 계백은 피로에 전 얼굴로 큰 나무 아래 기대 있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손에는 작은 풀꽃을 쥔 채로.

그리고 황산벌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앞에 둔 계백은 군사들에게 무릎을 꿇고 그간의 전투에 대해 경의를 표한 뒤 이렇게 말한다. “오늘만큼은 나라를 위해서도 역사에 남기 위해서도 싸우지 마라. 오늘만큼은 왕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싸우지 마라. 오직 그대들의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형제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살아남아라.” 나라를 위해, 왕을 위해 이 한몸 초개같이 버리자는 충성의 다짐 대신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장수의 불온한 외침은 그저 비장한 최후를 위해 마련한 일장 연설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드라마의 재미는 여기서 발생한다. 알다시피 계백과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황산벌 전투에 나서기 전에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밝힌 일 아니던가. 만약 이겨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계백에겐 그를 맞아줄 가족이 없다. 그가 죽였으니까.

자못 궁금한 것은 이 간극이다.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장에 나온 계백이 부하 장수들에게 살아남아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이기자고 말하는 것. 또한 살아남는 것의 막중함을 이야기하는 그는 무슨 연유로 가족을 죽이고 전장에 나섰는가. 아마도 모든 것을 타인의 음모로 인한 부득이한 일로 풀어내는 것이 가장 간단한 선택일 것이다. 더 나쁘게는 운명 뒤에 숨어버릴 수도 있다. 이 간극 사이의 계백을 그리는 데 실패한다면 육중한 갑옷을 걸친 장수의 손에 들린 작은 풀꽃은 겉멋 든 낭만타령에 다름 아니며, 가족을 만나 돌아가기 위해 싸우라는 연설은 기력이 다한 부하들을 마지막으로 쥐어짜는 공허한 말일 테니까.

그런데 계백에 앞서 왕명을 받드는 일과 가족을 지키는 일 사이에 놓였던 아버지 무진(차인표)의 캐릭터를 보면 나라와 가족 사이에 선 남자 계백의 이야기를 쉬운 방향으로 풀지는 않을 모양이다. 무진은 무왕의 비 선화와 아들 의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임신한 아내가 황후와 자기가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하겠느냐고 묻자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오”라고 답하거나 “당신이 이 무진의 황후요” 등등의 닭살 대사를 연발하는 등 아내에 대한 애틋함을 숨기지 않는다. 둘의 시간을 모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일방적이고 유난스러운 애정고백인데 대신 작가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는 분명해진다. 사극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과 가족을 지키는 것은 종종 나라를 택하는 충신과 가족을 구하려고 왕을 배신하는 간신을 가르는 선택지로 쓰이는데 <계백>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의 무게를 나라와 왕에 대한 충성에 비해 가볍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두고 싶은 것이다. 무진은 종종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아득한 추억에 젖고 아들 계백에게도 “손에 작은 가시 하나가 박혀도 가족이 다치면 아프다”고 말하는데, 아마 계백도 그렇게 자랄 것이다.

그리고 황산벌 전투에 나서기 전,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게 되는 그때와 마주할 것이다. 나라에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은 구리고, 외부로부터의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가 돼도 변태 같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드라마고, 이야기겠지. 성패를 가리는 것은 그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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