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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플래시백의 가장 나쁜 사례들

영화의 속도를 영화적 리듬으로 오인한 두편의 블록버스터 <퀵>과 <7광구>

윤제균이 제작한 올여름의 블록버스터 두편을 보았다. 소문이 무성했던 <>과 <7광구>를 같은 날 연달아 보고 나오면서 두 영화의 유사한 인상에 생각이 닿았다. <>은 윤제균식 코미디가 적절히 버무려진 한여름의 오락물로서 비교적 평이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7광구>는 기대 이하라는 평이 다수다. 그리고 혹평의 근거는 거의 대부분 괴물은 있는데, 이야기가 빈약하다는 데 맞춰진다. 정말 그런가? 이야기의 맥락에서라면, <>이 <7광구>보다 탄탄하거나 고급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두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할 때, 초점은 거기에 이야기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이들이 영화 에 이야기를 구겨넣는 방식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를 품고 오락을 붙잡는 게 아니라, 오락을 붙잡고서 이야기를 흘낏거리는 모양새의 측면에서라면, 두 영화는 유사한 것 같다.

말하자면 한편에 오락이 있고, 다른 한편에 이 오락과 섞이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 <>과 <7광구>에서 오락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오토바이 질주와 이어지는 폭발장면들일 것이다. 오토바이를 탄 이민기는 폭탄이 터지는 시각에 쫓기고, 오토바이를 탄 하지원은 괴물에 쫓기는데, 중요한 것은 왜 쫓기는지가 아니라 쫓긴다는 설정 자체다. 하나마나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 액션, 그 속도감이 두 영화가 겨냥하는 쾌감이다. 또한 그것이 두 영화의 현재다. 시간이 아니라 속도. 현재가 속도 그 자체라는 것은 현재가 이야기 없이도 작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롤러코스터를 타고서 이야기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건 놀이기구가 아니라 영화가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여름철 억대의 놀이기구가 되기로 작정한 두 영화들 앞에서, ‘서사가 빈약해’라고 불평하는 건, 맞는 말이기는 해도 어딘지 좀 과한 기대처럼 보인다. 대신 이렇게 질문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영화 대부분이 오락과 게임을 벌이고 있을 때, 최소의 이야기는 어느 자리에 밀어넣어져서, 이 오락과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는가. 두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불편했던 건, 영화에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 아니라 이들이 플래시백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현재는 오직 속도로 밀려나가면서,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들, 캐릭터를 묘사하는 순간들, 시간의 층위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모두 플래시백 속에 압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플래시백은 현재의 구멍, 비밀을 설명해주고, 현재를 서사적으로 이해 가능할 만한 것으로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두 영화의 플래시백은 지나치게 불필요하거나(<>), 지나치게 부족하다(<7광구>). 이들 영화에서 플래시백의 삽입은 (현재의) 속도와 (과거의) 시간의 부딪침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시간은 속도에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않으며, 그럴 생각도 없다. 인물들에게는 실은 이런 전사가 있다고 자꾸 보여주면서도, 영화의 현재는 딴청을 피우며 그와 전혀 관계없는 게임으로 진행시키는 것. 그러니까 <>과 <7광구>는 마치 두개의 분리된 이야기를 한 영화에 담고 있는 것 같다.

오락은 있는데 이야기는?

<>의 도입부 시퀀스는 2004년 광복절 폭주족들의 질주로 채워진다. 기수(이민기)가 어떤 여자를 뒤에 태우고 달리고 있고, 그 뒤를 춘자(강예원)가 울며 따라간다. 그리고 춘자의 이름을 부르며 명식(김인권)이 뒤쫓는다. 그러던 중, 춘자가 사고를 당하고, 기수가 춘자를 구하기 위해 거대한 트럭을 넘는데, 이어지는 장면은 6년이 지난 뒤다. 기수는 퀵 서비스맨이, 명식은 경찰이, 그리고 춘자는 ‘아롬’이라는 이름의 가수가 되어 남남으로 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수가 폭탄 운반원으로 지목되면서 셋은 재회하게 되는데, 아롬은 폭탄이 장착된 헬멧을 쓰고 기수와 함께 오토바이 질주에 동행하게 된다. 그 뒤를 경찰이 된 명식이 쫓는다. 상투적이고 빈약하기는 해도, 이 정도의 줄거리만으로도 기수-춘자-명식의 관계도, 혹은 이들의 캐릭터는 어느 정도 그려지며, <>이 지향하는 속도의 쾌감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질주의 와중에, 영화가 자꾸 과거의 정체된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빠진다는 점이며, 더 이상한 건, 그렇게 돌아간 곳이 방향을 잘못 찾은 과거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현재 기수와 아롬이 엮인 맹목적인 질주의 쾌감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라면, 영화는 기수가 대체 어떤 사건에 연루된 것인지, 왜 수많은 사람 중에 그가 선택된 것인지 등에 관련된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하고 풀어주는 편이 낫다. 만약 이 영화에 플래시백이 필수적이라면, 바로 그 역할을 하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후에 대한 궁금증을 ‘일단 출발하고 전달해’라는 명령 안에서 차단하고 미루고는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엉뚱하게도 거의 대부분이 기수-춘자-명식의 과거 러브라인으로 빠진다. 이미 도입부 시퀀스를 통해 우리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과거의 삼각관계를 굳이 몇번씩이나 돌아가서 보여주면서, 정작 폭탄테러를 둘러싼 범죄 조직도는 허술한 설명으로 대체하거나 지나쳐버린다. 기수와 아롬이 실은 폭탄으로 묶인 운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묶인 운명이라는 걸 설득하기 위함인가? 하지만 이 플래시백들이 없어도 현재의 질주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 같다. 영화의 후반, 테러의 주동자가 밝혀지고 그 모든 일들이 결국 도입부 시퀀스에서 기수가 저지른 행동과 관계된다는 걸 단 몇초에 모두 털어버리는 핵심 플래시백이 나올 때쯤이면, 그조차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껄끄러운 건 오토바이신들이 놀이기구나 게임의 쾌감만을 양산한다는 점이 아니라, 현재의 가벼운 질주 환상, 그 가상의 쾌감을 깨버리는, 현재와 맥락이 닿지 않는 플래시백들의 과도함(알고 보면 텅 빔)이다. 혹은 한쪽으로는 속도의 이면을 궁금해하지 말고 그냥 즐기라고 명령해놓고 다른 한쪽에서는 계속 그 이면에 강요된 신파를 깔아두는 이중적 욕망이 문제다.

<7광구>의 플래시백은 위와는 반대의 경우일 텐데, 그 상태는 더 심각하다. 연구원들의 잇단 죽음, 괴물과 관련된 20여 년 전의 사건, 괴물의 탄생, 선장의 야욕 등에 얽힌 비밀이 단 한 차례, 선장(안성기)의 고백 속에서 평면적으로 휙 지나간다. 그런 플래시백이 괴물과의 대결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아서 문제라는 점은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적했다. 하지원이 시종일관 괴물이 아니라 CG와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영화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캐릭터는 선장인데, 플래시백이 삽입되기 이전과 이후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일부러 그렇게 가장했다기보다, 영화가 속도에 대한 욕망과 시간의 드라마 사이에서 그를 하나의 일관된 인물로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인자한 선장의 이미지가 플래시백을 거치며 탐욕스러운 악인의 전형처럼 이해되다가, 이후에는 갑작스럽게 죄를 뉘우치고 희생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그의 정체를 둘러싼 이야기는 그가 죽음을 맞을 때까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건 <>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것으로, 현재의 속도와 과거의 시간이 어떤 식으로든 만나지 못할 때, 플래시백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은 종종 다른 부류의 이야기 안에 존재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처럼 보인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의 플래시백

두 영화는 영화의 속도를 영화적 리듬으로 착각하고 있다. 현재의 속도와 CG의 위용에 도취되면서도 최소의 이야기, 의미, 감정, 시간을 플래시백에 몽땅 밀어둔 다음, 게임이 아닌 영화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방어를 했다고 여기는 두편의 블록버스터들 속에서, 플래시백의 가장 나쁜 사례를 보았다고 생각할 때쯤, 또 다른 블록버스터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를 본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기는 했어도, 즐기지는 못했던 나에게 지난 일곱편의 복잡다단한 사건들은 사실 어수선한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상태로 마지막 편을 보는데, 냉혈한 스네이프의 죽음을 계기로 해리도, 그리고 지난 십년간 우리도 알지 못했던 그와 해리 사이의 기나긴 인연이 플래시백으로 마법처럼 영화를 휘감는다. 전체 시리즈의 분량을 생각할 때, 이처럼 충격적이고 중대한 사연이 이제야, 이렇게 한꺼번에 지나가는 것이 갑작스럽고 위험을 감수한 대담한 선택 같지만, 그게 장르의 단순한 반전의 장치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플래시백에 담긴 시간의 층위와 거기 새겨진 슬픔은 <해리 포터>의 지난 편들을 수놓은 화려한 마법의 기술들과 여러 죽음들, 해리의 유난히 고통스러웠던 성장담, 즉 해리 포터의 지난 시간들을 버티게 하는 것이었다. 플래시백이 서사와 인물의 결핍에 대한 보완물이 아니라, 혹은 무언가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영화가 지나온 수많은 현재의 자리들을 그럴 만했던 것으로 애틋하게 지탱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이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마지막 장을 보며 새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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