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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공작소] 주변에 널려 있다
지민(영화감독) 2011-08-25

지민 감독과 함께하는 우리 가족 영화 만들기(2) - 재료 선택

<혼자 집에 있는 건 슬퍼>

몇년 전에 결혼이민자인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영상을 만드는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한국에 이주한 지 1년이 채 안된 분들이어서 한국말이 서툰 편이었고, 저 역시 달리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없어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강의를 진행했어요. 다행히 사진과 동영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말이나 글 대신 이미지를 통해서 서로에 대해 알 수 있었죠. 그때 한분이 만든 <혼자 집에 있는 건 슬퍼>라는 작품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소개하려 합니다.

베트남에서 이주한 ‘미화’씨가 만든 작품인데요, 이 작품은 빈집의 곳곳을 카메라가 비추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아무 소리도 없는 조용한 거실, 부엌, 화장실, 안방 등이 화면에 등장하고 곧 베트남어로 된 제목이 타이틀로 나타납니다. 아침에 남편과 함께 밥을 먹고, 남편이 출근을 하면 청소를 하고 한글 공부를 하고, 혼자 점심을 차려 먹은 다음 한글학교에 가고, 남편이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는 그녀의 하루가 한 장면씩 영화에 나타납니다. 굉장히 단순한 내용이죠? 게다가 이 작품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요. 혼자 밥을 먹으며 틀어놓은 TV 소리나 한글 공부를 하며 틀어놓은 테이프에서 나오는 성우들의 목소리 정도만 들립니다. 그런데도 작품을 다 보고 나니 저는 그녀의 마음에 공감이 되고 외로웠던 어떤 순간들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대사가 없어도 그 화면들은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해주었고, 말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또 공감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중에서 영상이라는 매체는 그 이야기를 ‘이미지’로 풀어내면서 공감을 얻어야 하죠. 이번 회차에서는 이야기를 어떻게 영상 매체로 옮길 것인지 그 기초 작업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관객과 상영 공간부터 정하라

영화를 만들기 전에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을 누구에게 보여줄 것이냐’입니다. 지난 회차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가족을 대상으로 영상 작업을 할 경우에는 그저 화면에 내가 아는 사람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관객이 있는 반면에 지루하게만 느끼는 관객도 있으니까요. 또 웹에 올려서 볼 것인지 조촐하게라도 상영회를 만들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에서 볼 것인지도 중요한 부분이에요. 위의 두 가지는 ‘영화를 다 만들고 난 다음에 고민할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영화의 방향과 전체적인 틀을 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두 개의 선>은 저와 제 파트너가 동거를 하다 임신을 하게 되면서 결혼제도와 임신, 육아 등에 대해 같이 고민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저와 제 파트너였고요. 저희는 이 다큐멘터리를 ‘결혼제도나 비혼에 관심이 있는 20~30대 불특정다수’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영화제에 기획안을 내서 제작지원을 받았습니다. ‘영화제 관객을 대상으로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이 영화의 포맷이 된 셈이지요. 관객은 저희에 대한 정보가 없는 사람들이니, 왜 동거를 하게 됐는지에 대한 상황 설명도 필요하고 저희의 나이나 직업 같은 정보도 설명해야 했어요. 또 제가 평소에 성격이 괄괄한지 새침한지, 직설적인 사람인지 말이 없는 사람인지도 관객이 알아챌 수 있어야 하고요.

하지만 그런 설명이 필요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희는 동거를 시작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조촐한 축하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때도 영상을 만들어 친구들과 같이 봤었어요. 관객이 저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보를 설명하는 대신, 친구들이 알고 있는 저희의 성격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사진들을 사용해서 영상을 만들었어요. 같이 보는 공간이 술자리였기 때문에 일부러 대사없이 자막과 음악만 사용했고요. 관객과 상영 공간까지 같이 고민하면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얼개를 만들면 보다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체의 고리 역할 찾기

맨위 <두개의 선>, 가운데 <엄마의 일기장>, 맨 아래 <커밍아웃 여행>

가족영화를 만들게 되면 일상에서 영화의 재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앨범 속 사진, 오래된 물건, 일기장이나 옷가지도 그 사람의 캐릭터를 나타내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많은 재료들이 있는 만큼 어떤 재료를 선택하고 어느 부분에 배치할 것인가에 많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먼저 등장인물 캐릭터를 한줄로 설명해봅시다. 예를 들어, ‘우리 아빠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다’, ‘우리 아이는 매일 말썽을 부리는 장난꾸러기다’ 이런 식으로요. 지난 회차를 보고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찾아내고 나의 주인공만의 차별점도 찾아냈다면 더 좋고요. 구체적일수록 관객에게 힘있게 다가갈 수 있거든요. 모든 이야기는 ‘디테일’이 살리는 거 아니겠어요? ‘무뚝뚝하다’보다는 “집에 오면 ‘밥도’ 소리밖에 할 줄 몰랐던 우리 아빠”가 관객의 공감을 얻기가 더 쉬워요. 처음부터 완벽한 스토리를 만들려고 욕심을 부리기보다 캐릭터를 계속 구체화하다보면 자연스레 이야기를 엮을 수 있을 거예요.

지난 회차에 소개한 더그 블록 감독의 <엄마의 일기장>(51 birch street)을 예로 들어볼게요. 이 영화의 홈페이지에는 ‘당신은 당신의 부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크게 박혀 있습니다. 감독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금세 재혼을 하자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젊은 시절 어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자신이 실제로 부모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단 걸 알게 돼요. 그리고 일기장을 통해 젊은 시절 어머니를 만나면서 어머니가 여자였음을 깨닫게 되죠. 이 작품의 ‘일기장’처럼 어떤 ‘재료’는 영화 전체의 고리 역할을 해주고 이야기를 엮어줍니다. 엄마의 오래된 원피스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입었던 배냇저고리도 이런 고리 역할을 해줄 수 있어요.

고리 역할은 물건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사포 감독의 <커밍아웃 여행>은 레즈비언이자 감독인 딸이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위해 둘만의 여행을 하는 내용인데요. 허물없는 말투, 딸이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걱정하는 목소리, 그리고 서로를 번갈아 찍는 카메라는 모녀 사이의 애틋한 정을 잘 느끼게 해줍니다. 감독이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 서로의 상처를 걱정하며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정말 짠하게 다가옵니다. 모녀간의 여행은 이 상황을 보다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고리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여행을 가기 전과 다녀와서의 모녀의 관계는 달라졌고 그 짧은 시간의 성장을 영화는 잘 담아내고 있죠.

캐릭터를 구체화하고 자료를 찾는 일은 자신의 머릿속에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것들을 관객이 볼 수 있도록 영상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진 한장, 물건 하나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증명사진도 앞뒤로 어떤 내용이 붙느냐에 따라 새로운 맥락을 만들 수 있고, 관객이 그 이미지를 재해석할 수 있게 하죠. 자막이나 내레이션 등의 효과를 통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요. 그 기본이 되는 ‘재료 선택’까지 진행됐다면 제작 과정의 절반 이상을 넘어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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