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TView
[유선주의 TVIEW] 나 무능하다, 왜?

드라마 속 재벌 3세 캐릭터의 변화

SBS <여인의 향기>.

“본부장 직함을 달았지만 일은 안 할 생각입니다. 저기 계신 강철만 회장님 낙하산이죠.” SBS <여인의 향기>의 재벌 3세 주인공 강지욱(이동욱)의 대사다. 재벌이라고 부를 만한 부의 규모를 가진 집단의 2세들은 대충 50줄이 넘었으니 드라마에도 이젠 3세 시대가 왔다. 재벌 2세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들에서는 자식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 캐릭터의 매력에 경영권도 은근슬쩍 넘어가곤 했었다. 고난을 이겨낸 연인들의 해피엔딩인 ‘…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처럼 아마 그 회사도 행복하게 경영했겠지. 그리고 문제는 드라마 밖에서 벌어졌다. 경영권 세습은 상속세를 내고 아버지의 부를 물려주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세습한 2대 경영인의 무능이나 부패가 알려지면서 무능력한 자식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일이 구려도 보통 구린 게 아니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트렌디 드라마는 유행뿐만 아니라 시대의 정서도 민감하게 포착해서 반영한다. 재벌 2세들의 무능이나 부패를 목격한 시청자에게 드라마라고 어물쩍 경영권을 물려주는 일 따위가 순순히 통할 시절은 지났다. SBS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현빈)이 경영권을 물려받을 만한 유능한 사람이란 것을 부단히도 반복한 것도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일의 구림을 인식한 방패막이가 아니었을까.

또 다른 재벌 3세 드라마를 보자. 방영 중인 SBS <보스를 지켜라>에서는 아들이 맞았다고 룸살롱 직원들을 직접 찾아가 폭행했던 모 재벌의 이야기를 설정으로 끌어온다. 아버지 박영규는 무능한 아들 차지헌(지성)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안달복달하는데 극중 언론은 ‘무리한 경영승계’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회사 직원들은 회장 아들이 매일 빈들빈들 놀러 다니고 늦게 출근하는 것이 직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었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별 능력도 없고 까불거리는 차지헌은 극중에서나마 능력을 ‘증명’해내야 하는 과업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강지욱은 늘 권태에 찌들어 있으며 일에 의욕이 없는 재벌 3세다. 재벌은 재벌인데 여행회사인 중소형 재벌이라 훨씬 큰 규모의 재벌인 카드회사 회장의 딸과 정략결혼을 해서 기업을 부지해야 하는 형편. 그의 아버지는 “네가 누구 덕에 이 모든 것들을 누리는데!”, “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라고 말하며 아들의 모습을 극 밖으로 폭로한다.

우리의 재벌 주인공들이 부와 가족을 등지고 사랑하는 여자를 선택하는 게 드라마의 공식이라면 강지욱의 풀이는 좀 색다르다. 부와 가족간의 유대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 사이에의 갈등이 아닌, 시키는 대로 살아온 관성과 그 관성을 깨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다. 그의 약혼녀는 “우리 아버지가 가만있을 것 같아? 회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고 압박하는데 권태로운 표정의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마음대로 해. 상관없어.” 파혼 통보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진 아버지 앞에서도 같은 표정이다. 어머 본부장님, 쿨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이건 강지욱의 사랑과는 별개로 자신이 이뤘거나 그것을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탰던 기업이 아니라서 애착이나 집착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아버지의 회사에 기여한 바가 없으니 집착도 없고 동시에 책임감도 없는 재벌 3세 캐릭터인 것이다. 물론 이 정도로 드라마가 혁명적인 재벌 비판을 하고 있다고 호들갑스럽게 칭찬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꽤 재미나지 않나? 무능해서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그리고 권태로운 재벌 3세라니.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