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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운성의 시네마나우] 필리핀영화의 귀환

이미지의 분리를 드러낸 라야 마틴의 신작

<부에나스 노체스, 에스파냐>

남다른 감식안을 자랑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동시대 필리핀영화가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필리핀영화로는 리노 브로카 이후 처음으로 브리얀테 멘도자의 <서비스>가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당시 24살에 불과했던 라야 마틴의 네 번째 장편 <상영 중>이 감독주간에서 상영되었으며, 라브 디아즈의 <멜랑콜리아>는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마틴의 두 번째 장편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2005)이 뒤늦게 프랑스에서 개봉해 그 해 <카이에 뒤 시네마> 베스트10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9년 중반까지 기세를 이어가던 필리핀 독립영화인들의 행보는 그 해 9월1일 그들의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였던 영화평론가 알렉시스 A. 티오세코와 그의 연인인 슬로베니아 저널리스트 니카 보힝크가 권총강도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별안간 주춤하게 된다.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는 그들 사후에 필리핀 독립영화감독들은 물론이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호세 루이스 게린, 존 지안비토 등 외국 영화감독들이 그들에게 헌정한 작품의 목록이나 필리핀 내 몇몇 영화제가 마련한 추모 프로그램(9월에도 하나가 예정되어 있다)을 확인해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2010년, 존 토레스의 <후렴은 노래 속의 혁명처럼 일어난다>처럼 몇몇 빼어난 작품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국제적인 주목을 받은 필리핀영화들은 거의 없었고 디아즈, 마틴, 멘도자의 신작은 나오지 않았다.

반갑게도, 그동안 숨을 고른 필리핀 영화인들의 귀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라브 디아즈의 6시간짜리 장편영화 <출산의 세기>가 베니스영화제 라인업에 뒤늦게 추가되었는가 하면,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 브리얀테 멘도자의 <포획>이 이미 완성되었으며 (그의 전작 <할머니>(2009)가 그러했듯) 올해 베니스에서 깜짝 상영 될 것이란 ‘소문’도 들려온다. 그리고 라야 마틴은 스스로 “현대판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108필름>이 될 것”이라고 밝혔던 9번째 장편영화 <부에나스 노체스, 에스파냐>를 완성했고, 이 작품은 얼마 전 폐막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부에나스 노체스, 에스파냐>

라야 마틴이 “네오 사일런트 SF”라 부른 <부에나스 노체스, 에스파냐>는 스페인 여배우 필라르 로페스 드 아얄라를 주연으로 캐스팅해 소규모의 스태프와 함께 스페인에서 촬영한 슈퍼 8mm 무성영화다. 무성영화 시기의 착색(tinting) 기법을 본뜬 다양한 색조의 화면들이나 텔레포트(공간이동) 같은 SF적 설정 등이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로테르담 영화제 트레일러로 기획된 1분짜리 단편 <아르스 콜로니아>(2011)와 더불어 이 젊고 모험적인 감독의 ‘미학의 정치’가 현재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적인 영화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두 작품에서, 마틴은 앞서 언급한 착색 기법을 비롯해 음화(negative), 과다노출, 이중인화, 스크래치 및 핸드페인팅 등을 전면적으로 활용해 이미지의 대상(인물과 사물, 상황과 행동)과 이미지의 결(texture) 간의 분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과거의 이미지들이 사라지고 낡아가는 시대, 텔레비전 시대에 태어난 마틴과 같은 세대들에게, 이미지를 명료하고 통일된 상태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라야 마틴은 “오늘날 이미지를 파괴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리얼리즘에 대한 저항 속에서… 한때 역겹도록 잘못 다루어졌던 이미지를 읽는 새로운 방식, 우리 세대가 보아온 초라한 모습의 이미지들과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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