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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적이고 절대적인, 이제는 멸종되어가는 진정 영화적인 것 <북촌방향>
송경원 2011-09-07

홍상수의 열두 번째 영화이자 두 번째 흑백영화. 모든 장면을 인사동 북촌마을에서 촬영한 영화. 북촌에서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는 어느 영화감독의 궁색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 늘 그렇듯 술이 있고 여자가 있고 치근덕거리는 남자가 있는, 찌질한 욕망과 귀여운 허세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영화. 한참을 낄낄대다가도 어느 순간 서늘해지는 냉소적인 영화. 홍상수의 겨울영화.

<북촌방향>을 설명하기 위한 말의 부스러기를 아무리 모아봐도 뭔가 부족하다. 정보가 촘촘해질수록 반대로 성긴 단어의 그물을 의식하게 될 뿐 영화의 신비한 정서를 전달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는 의미를 부여할수록 함정에 빠지는 미로 같다. 우연과 마법 같은 순간들로 가득 찬 화면들은 의미를 하나로 고정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비웃는다. 그걸 알면서도 속물스런 욕망과 비루한 얼굴들을 마주하는 순간, 출구가 없는 이야기의 미로에 뛰어들고 싶은 욕구가 뭉근하게 끓어오른다. 영감으로 가득 찬 이 모호한 영화는 익숙한 서사가 아닌 뭉툭한 정서에 기댄 시적 기록에 가깝다. 영화라는 해체 불가능한 덩어리. 그 해 겨울이 품었던 사람냄새.

지방대학 교수이자 영화감독인 성준(유준상)은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서울에 올라온다. 선배 영호(김상중)만 보고 바로 내려가리라 마음먹은 성준이지만 막상 인사동 북촌마을에 이르자 의도치 않은 만남들이 그를 찾아온다. 선배를 기다리며 북촌마을을 맴도는 사이 알고 지내던 여배우를 만나고, 한 무리 영화학도들의 술자리에 동석하고, 옛 애인 경진(김보경)의 집을 찾아간다. 시간이 지난 뒤 간신히 연락이 닿은 선배는 아끼는 여자 후배라며 젊은 여교수(송선미)를 소개시켜주고 늦은 밤 세 사람은 ‘소설’이란 술집으로 향한다. 옛 애인과 닮은 ‘소설’의 젊은 여주인 예전(김보경)을 보고 설레는 성준. 묘한 분위기의 밤이 흐르고 또다시 ‘소설’에서 모인 사람들. 여주인과 성준이 키스를 나눈 밤이 지나고 작별인사와 함께 북촌을 떠나려는 성준. 그날 아침 북촌에는 눈이 내리고 그 길 위에서 과거에 알았던 사람,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 낯선 사람들과 계속 마주친다.

<북촌방향>은 흐르는 시간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사건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이야기는 미로처럼 북촌을 맴돈다. 같은 장소로 계속해서 돌아오는 이야기는 마치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선형적 서사 대신 여러 시간성이 한 장소에 고여 있는 이 영화는 ‘북촌’에 모인 (혹은 갇힌) 이야기 다발을 인과관계 대신 우연이란 매듭으로 연결한다. 홍상수답게 술자리와 수다를 통해 시간 다발을 풀어내는 <북촌방향>은 관객으로 하여금 입체적이고 순환적인 시간 경험을 가능케 한다. 남는 것은 너저분한 수다 속에 파도치는 감정의 스펙트럼. 포근하고 몽환적인 눈발 사이 하찮은 위로. 사진적이고 절대적인, 이제는 멸종되어가는 진정 영화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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