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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그 사랑은, 혁명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시저는 왜 캐롤라인과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까

우리는 왜 유인원 시저를 사랑하게 되었나. 많은 필자들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혹성탈출>의 감흥을 이 물음에서 찾았다. 인간과 동물, 배우와 CG 사이 그 어딘가에서 감정의 진폭을 만들어내는 이 존재는 ‘스펙터클’ 앞에 ‘섬세한’이라는 수사가 붙는 순간의 영화적 울림을 증명해 보인다. 수많은 영화들이 인간적이나 인간은 아닌 것, 그러니까 실은 그 미묘한 차이가 자아내는 외설적 쾌감을 호기심으로 넘보았지만 <혹성탈출>에서만은 그 차이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차이에는 ‘인간적’이라고 믿어져왔으나 더 이상 인간에게는 없는 것, 미개함이 아닌 정신적, 육체적 우월함이 있다. 이 진실하고 정의로운 존재의 핵심이 앤디 서키스이건 퍼포먼스 캡처이건 시저라는 캐릭터의 성정이건 간에 이와 관련된 진중한 논의들은 이미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그러니 영화의 논점에서는 다소 벗어난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좀 엉뚱한 질문을 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동물과 인간, 아들과 아버지… 그 사이의 여자

질문은 이것이다. 시저는 왜 캐롤라인(프리다 핀토)과 사랑에 빠지지 못했나? 스스로를 인간으로 생각했던 유인원은 왜 아름다운 인간 여인에게 욕망을 두지 않았는가? 물론 <혹성탈출>을 <킹콩>이라고 우길 마음은 없다(하지만 <혹성탈출>을 보는 동안 시저에게 느낀 일련의 감정이 오래 전 킹콩에게 느낀 감정과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좀 우스운 고백. 이 검고 거대한 유인원들은 영화 속 그 어떤 매력적인 인간 남자보다도 왜 이토록 섹시한가. 언젠가 누군가는 그 감흥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딱 잘라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내 느낌의 근원은 지금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고, 어쨌든 영화를 보는 동안 문득 글 한편이 어렴풋하게 기억났다는 사실만큼은 밝혀야 할 것 같다. 허문영 평론가가 쓴 피터 잭슨의 <킹콩> 비평으로, 글의 주제는 ‘야수는 왜 미녀에게 매혹되는가’였다(‘미녀가 야수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 <씨네21> 534호). 그 매혹의 정체를 애완동물의 신화로 설명한 그의 글과 이 글은 다른 맥락에 놓여 있지만 아마도 그 글의 잔상에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를 결국 인간의 이기심이 문제다, 라고 요약하는 것보다는 이 불가능한 질문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해보는 게 더 흥미로워 보인다. 그 질문이 희미한 가능성으로 작은 구멍처럼 영화 안에 숨겨져 있고, 그 구멍을 중심으로 시저와 인간 남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랑코)의 관계가 맴돌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때, 인간 지능을 가진 동물과 그를 창조한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감정적, 물리적 자리는 보이는 것보다 모호하게 얽혀 있다.

위의 질문으로 이끄는 몇몇 장면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전에, 이 영화의 유일한 여자 캐릭터인 캐롤라인에 대해 말해야 한다. 수의사로 나오는 그녀는 몇 차례 시저를 치료해주거나, 윌의 신약개발 실험을 우려하지만 수의사로서 적극적인 입장을 내놓거나, 동물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한 적은 없다. 표면적으로 그녀의 역할은 다른 등장인물들, 심지어 다른 유인원들에 비해서도 미비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녀를 필요로 한다면 그건 수의사의 자리 때문이 아니라, 윌의 애인의 자리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실은 서사상 없어도 그만일 둘의 멜로를 한 켠에서 계속 붙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우리는 수없이 많은 침팬지들을 상대해왔을 그녀가 점점 커가는 시저와의 일상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윌에게 “그들을 좋아하지만 두려워요”라고 고백한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아기 침팬지가 거대한 몸집으로 자라나는 5년의 시간을 삼나무 숲에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시저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보여주는 장면의 리듬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황홀한 장면 중 하나다. 금문교가 내려다보이는 숲 꼭대기에 오른 시저는 이제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고, 더 이상 귀여운 동물의 모습이 아니다. 그때 시저가 숲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윌과 캐롤라인이 관계의 진전을 말해주듯, 자리를 깔고 누워서 다정하게 키스를 하고 있다. 시저의 그 표정은 딱 하나의 감정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확실히 천진난만함이나 순진함과는 다른 강렬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 내면의 감정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표정은 호기심과 질투가 뒤섞인 것 같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아무튼 묘한 구석이 있다. 시저는 그렇게 두 남녀를 쳐다본 다음, 쏜살같이 나무를 타고 내려와 이들 사이를 방해하며 (내 기억이 맞는다면) 키스를 흉내내듯 입을 내미는 제스처를 취한다. 시저의 이런 표정과 행동은 귀여운 애교보다는 좀 아슬아슬한 감정과 욕망의 표출처럼 보인다. 이후 시저에게 나타나는 슬픔이나 분노 같은 인간적으로 이해 가능한, 그래서 우리가 감탄하게 되는 표정보다 이 순간의 얼굴이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이유는 그것이 인간적인 이해 혹은 상식의 테두리를 줄타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시저의 그런 제스처가 내게는 마치 캐롤라인을 향한 것처럼 보였는데, 윌은 자신을 향한 애정표시라고 쉽게 생각하는 듯, “그래, 나도 사랑해”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한 가족의 모습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이 광경은 어딘지 이상하고 위태로운 기운을 품고 있다. 그건 바로 뒤이은 장면에서 보다 확연하게 느껴진다. 숲을 나서는 이들이 개와 산책하는 어느 가족과 마주치자, 개가 시저를 보고 사납게 짖고 시저는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공격성을 표출한다. 그런데 그 사나움보다 놀라운 건 개에 채워진 목줄처럼 걸어다니는 거구의 생명에 채워진 목줄이다. 윌은 목줄을 잡아당기며 “안돼”라고 외친다. 그 이미지는 가혹하다. 시저는 윌에게 묻는다. “시저는 애완동물이야?” 윌의 대답. “나는 너의 아빠야.” 사람들이 애완동물에게 스스로를 아빠, 엄마로 칭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라면 윌은 시저의 물음에 긍정하는 걸까, 부정하는 걸까. 게다가 이 아빠는 결과적으로 엄마를 죽인 장본인이다. 시저의 질문과 윌의 대답, 그리고 목줄에 끌려 걸어가는 유인원의 이미지는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이 시퀀스에는 겉으로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로 구분되지만 지능으로나 몸짓으로나 감정으로나 별반 다르지 않은 같은 수컷들 사이에서, (종의) 차이가 아니라 (같은 성의) 공유지점이 자아내는 긴장감 같은 것이 있다. 둘 사이가 인간주인과 애완동물의 관계이건 유사 부자관계이건 간에 이 시퀀스의 장면 연결에서 나는 좀 과격한 비약인지 모르겠으나 두 가지 금기가 함께 작동하며 건드려지고 있다고 느낀다. 동물과 인간은 성적으로 탐할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여자를 탐해서는 안된다.

‘좋아하지만 두려워한다’던 고백의 의미

또 다른 장면에 대해 말해볼 수도 있다. 윌과 캐롤라인의 손에 이끌려 보호소에 갇혀 있던 시저가 다른 유인원들을 끌고 혁명을 일으키기 전날 밤, 윌의 집에 몰래 들어온다. 시저는 한 침대에서 껴안고 잠이 든 윌과 캐롤라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일까. 말없이 방을 빠져나온 시저는 냉장고에서 신약을 훔쳐 요란하게 마을을 빠져나간다. 물론 정황상으로는 시저가 무지한 동료들을 각성시킬 신약을 가지러 집에 온 걸로 보이지만 윌과 캐롤라인을 쳐다보며 한동안 서 있던 시저의 슬픈 형상이 매우 정서적으로 찍혀서 마치 시저로 하여금 다음 선택을 하도록 이끄는 결단의 순간처럼 느껴진다. <킹콩>이 인간과 동물의 아름답고 비극적인 멜로를 중심에 둔다면 <혹성탈출>에는 인간 여자를 중심으로 다른 종의 두 수컷간의 옅은 삼각형 구도, 적대와 경쟁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거나 아직 의식하지 못한 관계가 있다. 침팬지를 ‘좋아하지만 두려워한다’던 캐롤라인의 고백도 함께 떠올려보자. 두려움은 거의 언제나 잠재된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수화만 구사하던 시저가 보호소에서 인간에게 처음 내뱉은 음성 언어가 “no”라는 사실에도 의미를 둘 수 있다. 왜 하필이면 ‘no’일까. 아마도 그 단어는 인간과의 동거생활에서 그에게 가장 익숙했던 의미의 단어였을 것이다. 윌은 그에게 결코 혼자 집 밖을 돌아다녀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동물적인 공격성, 동물적인 욕구는 금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인간의 지능을 갖게 되어도, 인간의 영역에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경고다. 인간적 규범에 적응해야 하는 동물의 도덕. 유인원 시저는 인간 여자에게 성욕을 느껴서는 안된다. 흥미로운 것은 시저가 인간과 사는 동안 체득했을 이 금지의 명령을 거부하는 표현으로 바로 그 단어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세계와 동물세계를 경계짓던 금기의 언어를 그 경계를 균열하는 저항의 언어로, 새로운 ‘유인원적’ 규범의 언어로 쓴다. 영화의 마지막, 여전히 시저를 구해서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믿는 무지한 윌에게 시저는 위엄있게 거절의 문장(‘no’라는 한 단어가 아니라, ‘no’를 표현하는 문장)을 말하고 다른 유인원들과 함께 삼나무 숲 꼭대기에 오른다. 시저는 이전과 똑같은 자리에서 인간 남녀의 생태계를 훔쳐보는 대신, 인간의 세계를 내려다본다. 그는 인간질서의 금기와 충돌하는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는 대신, 아예 새로운 질서의 세상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 새로운 질서 속에서 혁명가 시저는 금기를 부수고 이제 용맹하게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혁명. 혹은 함께 혁명을 완수한 같은 종 어느 암컷에게 의리를 지키며 미래를 약속하게 될까. 그러니까 유인원들만의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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