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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비슷할 뿐, 나 사실 팬티 많은데…

<북촌방향>의 영호는 팬티를 갈아입었을까, 안 갈아입었을까?

왜 내 눈에는 꼭 사소한 것, 사람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 보일까? <북촌방향>만 해도 옷의 관점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 생각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가. 영호의 체크 셔츠와 중훈의 체크 셔츠를 놓고 같은 체크무늬지만 두 체크의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를 논하며 체크무늬로 이미지 연출하는 법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벨트 달린 카멜 롱코트와 체인 장식 숄더백이 만들어내는 예전의 여성성 vs 검은색 반코트와 가죽 토트백으로 표현된 보람의 일상성’에 대해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눈엔 그런 것들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 모든 관심은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영호는 팬티를 갈아입었을까, 안갈아 입었을까?’, ‘만약 갈아입었다면 빨아서 입었을까, 날짜 수만큼 챙겨온 여벌에서 꺼내 입었을까?’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늘 생각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 영화 한편을 두고 한 가지 문제(팬티를 갈아입었을까, 안 갈아입었을까)를 계속 생각하다 보면 영호 일당이 늘 똑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지만 그 비슷비슷해 보이는 시간이 사실은 다 다른 날이고 시간인 것처럼 입은 옷도 알고 보면 다 다른 옷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들 모두가 단벌신사, 단벌숙녀거나 옷이라고는 두세벌밖에 없어 한벌을 벗으면 남은 옷이 더러워지기 전에 냉큼 빨아서 말려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옷장 속에 비슷하거나 똑같은 옷 수십벌을 좌르륵 쟁여놓고 매일 비슷한 옷을 꺼내 입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꼴도 보기 싫어”를 외치고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서도 어디선가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다시 마음이 설레는 것처럼 ‘꽂힌’ 아이템을 몇개씩이나 옷장 속에 쟁여두고도 늘 그 아이템을 보면 마음이 설레는 게 인지상정이고, 경진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상태로 경진과 닮은 예전에게 혹하는 영호처럼 지난 주말에 산 자신의 시그니처 아이템(쉽게 말해 한 사람이 꽂혀 있는 아이템)이 든 쇼핑백을 방 한구석에 던져둔 채로 또 다른 쇼핑에 나서는 게 인간이니까(그렇게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나만 찌질한 건 아냐’만큼이나 ‘나만 똑같은 걸 계속 사는 건 아냐’로 안도감을 준달까).

그나저나 영호는 팬티를 갈아입었을까, 안 갈아입었을까? 홍상수 감독님,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답해주세요! 그리고 다음 영화에선 찌질이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이랑 자고 돌아 나오면서 “그녀와는 꼭 맨 처음 같이 자던 날 입은 것과 똑같은 팬티 입은 날만 같이 자게 된다. 나 사실 팬티 많은데…” 식의 독백을 넣으면 어떨까요? 그 장면을 넣어주시면 많은 남자들이 왠지 공감하면서 위안을 받을 것 같은데….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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