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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홀린다, 두렵다

홍상수의 <북촌방향> 속 되감기는 시간, 혹은 되감기는 사건의 감흥

북촌을 걸어본 사람들은 익히 경험한 것이겠지만 북촌은 장소 자체에 시간의 질감이 돌돌 말려 있는 곳이다. 우리가 북촌이라는 장소를 걸으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무엇보다 북촌이 현재와 과거가 팽팽하게 힘을 겨루는 곳, 즉 시간이 흐트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북촌 자체에 시간을 뒤흔드는 힘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북촌방향>에는 정말 뜬금없이 민방위훈련 장면이 등장한다. 만약 이를 알려주는 성준(유준상)의 내레이션이 없었다면, 우리는 시간이 멈췄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북촌방향>에서 이 장면이 주는 감흥은 영화적 공간에서 운동이 사라지면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도록 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체험한다고 말하는 시간이란, 그저 공간 속 운동의 효과인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운동이 정지하며 시간이 멈췄다고 느끼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제야 자신이 시간 속에 존재했음을 깨닫는다. 시간에 대한 감각은 운동이 매끈하게 지속될 때가 아니라(영화의 편집은 이러한 수평적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운동이 멈추거나 충돌하며 균열을 일으킬 때 지각되는 법이다. <북촌방향>이 우연의 힘을 믿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우연은 우리가 원할 때가 아니라, 그것이 원할 때 우리 앞에 출현한다. 때문에 우연은 돌발적이고 예측할 수조차 없는 시간의 무분별한 계기를 촉발한다.

만남에서 이별까지, 아니 집착까지

<북촌방향>이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도 매끈한 직선의 시간을 비트는 극적 구조 때문일 텐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정한석과 장병원의 흥미로운 ‘가설’이 있으니 이를 참고하면 될 일이다(<씨네21> 819호, 820호). 내 관심은 <북촌방향>의 신묘한 시간 체험에 대한 고백도, 극적 구조에 대한 분석도 아니다. <북촌방향>은 사나흘, 혹은 하루 동안의 유사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생한다. 인물들은 유사한 행위를 반복하며 원점으로 자꾸 되돌아가는데, 그럼에도 영화의 스토리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덧붙여지며 점점 두터워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예전/경진(김보경)이라는 인물이 성준과 맺은 관계가 (표면에서 드러난 스토리가 아닌) 잠재적 층위의 스토리를 작동시킴으로써 영화 스토리 전체를 어떻게 확장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가설을 덧붙이고 싶다. 먼저 예전이라는 이름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챘겠지만, 예전이라는 이름에는 언어적 유희가 있다. 경진으로 (이미) 등장한 김보경이 1인2역을 맡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예전이라는 명명 속에는 과거의 경진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상기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런데 <북촌방향>에서 예전이라는 이름은 마치 북촌마냥 시간을 흐트러트리는 힘이 있다. 왜냐하면 예전이라는 이름이 과거 지향성(과거의 경진)을 갖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성준의 눈앞에 현재의 인물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전이라는 존재 자체는 ‘과거의 현존’처럼 시간의 뒤틀림 그 자체인 것이다. 예전이라는 이름이 밝혀지는 것은 두 사람이 첫 키스를 하던 날 밤이다. 성준이 이름을 묻자 그녀는 예전이라 답한다. 첫 키스와 예전. 경진과 똑같은 모습의 그녀에게 ‘예전’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첫 키스에 덧입혀질 때, 성준과 키스를 나눈 여인이 예전인지, 경진인지 단언하기 힘들어진다. 물론 나는, 그리고 이 글은, 결국 그녀는 경진이라는 입장이다. 결국 사랑의 시작 지점(의 회상). 지금껏 홍상수 영화에 무수히 많은 키스신이 등장했지만, 이들의 키스만큼 달콤한 키스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두 번째 만남, 혹은 지속된 관계의 끝. 그렇다면 두 번째 키스 장면 이후, 예전은 갑작스럽게 경진처럼 행동한다, 라고 말하면 안되지 않을까? 그녀는 첫 번째 키스의 순간에도 경진이었고, 지금도 경진이다. 다만, 지금의 경진은 (첫 번째 키스 장면에 비해) 좀더 가까운 과거의 경진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두 번째 키스 이후, 예전, 혹은 과거의 경진이 “오빠, 헤어지고 오는 거지요? 나한테?”라고 말할 때, 그것은 동행과 헤어진 뒤 자신에게 오라는 표면적 의미보다는, 모든 걸 버리고 나한테 와달라는 간곡함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은 상투적 표현이다. 결혼한 남자와 사귀는 여자가 말할 수 있는. 다음날 아침 성준이 예전에게 마지막이랍시고 남기는 당부 역시 마찬가지다. 이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의 지속된 만남, 그리고 헤어짐과 관련한 과거 상황이다. 그런데 정한석이 지적한 것처럼, 그날 밤 성준이 예전의 가게에 다시 찾아와 나누는 일련의 대사와 고덕동 경진의 집에서 나눈 대사는 시간의 순서가 역전되어 있다. 즉, 섹스 이후 “오빠처럼 이렇게 나 쳐다보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라는 예전의 대사와 고덕동 집에서 경진이 자신의 눈을 쳐다보라는 요구는 정황상 예전의 대사가 먼저고 경진의 대사가 나중이어야 하지만, 우리는 경진의 대사를 먼저 듣고 난 뒤에 예전의 대사를 듣게 된다. 이러한 전후 관계는 경진의 집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이별 뒤의 ‘재회’라는 또 다른 단계임을 증명한다.

세 번째 만남, 혹은 첫 번째 만남, 혹은 재회. 불쑥 찾아온 성준과 재회한 경진은 더이상 예전이 아니다. 그녀는 오로지 경진일 뿐이다. 김보경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 인물의 현재성을 내비치는 것은 성준과 재회한 자신의 집에서뿐이다. <북촌방향>은 영화의 도입 부분에 경진을 보여준 뒤, 그 이후부터는 그녀를 육체없는 목소리로 현재의 시간에 부유하도록 한다. 어쩌면 고덕동 경진의 집 이후에 또 다른 사랑의 단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를 상실하고 목소리만 남은 미련, 혹은 집착의 단계. 어쨌든 <북촌방향>은 유령처럼 목소리만 남은 경진(현재의 경진)과 육체로 현존하는 예전(과거의 경진)을 충돌하게 함으로써 시간의 파열음을 들려준다. 성준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현재의 그녀가 아니라 과거의 그녀이고, 현재는 과거의 힘에 의해 밀쳐지고 만다(경진은 문자로 말한다. “날 밀쳐내지 마세요”라고. 하지만 성준은 경진의 목소리를 밀쳐내고 예전을 따른다). 현재의 시간은 과거(자꾸 되돌아가는 원점)에 반복적으로 자리를 빼앗긴다. 현재의 시간이 자꾸 과거로 되감기는 것은, 현재를 다양하게 분기할 우연의 길로 들어서기를 주저하기 때문일까?

불길한 기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우리는 네명을 ‘우연히’ 만나는 성준을 본다. 우연의 반복이라는 또 다른 우연.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관계의 시작. 또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만큼 시간이 충돌하고 균열하며 요동치는데, 성준처럼 변하지 않는 인물을 만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성준이 예전/경진의 계열과 구별되는 또 다른 계열의 선을 그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힘들 듯하다. <그가 도착한 날>(The day he arrives)이라는 영문 제목처럼, 성준은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그 장소에 도착할 것이다. 성준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재회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북촌방향>의 엔딩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나는 그 엔딩에서 불길한 기운에 두려움을 느낀 쪽에 속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성준은 영원히 영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을 듯한 불길한 징조. 고현정과의 만남, 그것은 얼핏 우연을 통한 새로운 계열이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내겐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유준상에 의하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성준의 표정은 고현정에게 홀리는 장면이라 한다. 우리는 이미 예전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에게 홀린 성준의 표정을 본 바 있다. 그리고 그 홀림 이후에 그가 어떠한 계열의 선을 따라갔는지도 이미 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고현정과 만나 그릴 계열은 예전에게서 경진으로 향하던 계열의 반복에 불과하지 않을까? 무심하게 울리는 찰칵, 찰칵, 셔터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그를 가둔다. 북촌의 지도와 함께.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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