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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남성적이고 계몽적인 서사에서 벗어날 길은 없나

다중의 카메라를 제압하는 단선적 구조, <라이프 인 어 데이>

기차 발명과 철도 시간표로 인한 세계 시간의 표준화는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가능하게 했다. 그 이후 인간은 세계 곳곳으로 점점 더 빠르게 날아가게 되었다. 이제 인터넷은 방 안에 앉아서 세계 각국의 골목길은 물론 안방 풍경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의 손에 들린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휴대폰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찍고 찍히고 전송하는 일을 숨쉬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는 감독이라는 거창한 호칭 없이도 찍을 수 있고, 배우라는 화려한 수식 없어도 찍힐 수 있다. ‘197개국 8만명이 함께 찍은 영화’라는 <라이프 인 어 데이>는 그러한 삶의 변화를 영화 형식 안에 담으면 어떨까를 메이저급으로 실험한 작품이다. 토니 스콧과 리들리 스콧 형제가 제작 기획하고 케빈 맥도널드가 연출한 이 작품의 컨셉을 전해들었을 때 나는 상당히 흥분하며 실체를 기다렸다. 그런데 사실 이 기대는 상당 부분, 이 영화가 어느 날 하루 유튜브에 업로드된 화면들을 골라 편집한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 이 영화는 촬영 이전에 사전 공모와 기획을 통해 찍힌 프로젝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와 보이는 이간의 절대적 권력이 최소화된 영상, 또 전세계인이 찍은 복잡다단한 삶의 단면들을 모아서 하나의 텍스트로 직조한다는 기획은 흥미로웠다. 그것은 카오스일까 코스모스일까? 혹은 카오스모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라이프 인 어 데이>가 만들어낸 세계는 ‘코스모스’에 가깝다. 질서있는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197개국에서 4500시간에 달하는 8만개의 영상 클립 가운데 선별된 1125편의 영상은 하루라는 시간의 틀 안에서 배치된다. 그리고 그 하루는 다시 인간의 일생에 유비된다. 아침은 아가, 점심은 청년, 오후는 장년, 저녁은 노년으로. 모든 영상이 정확하게 이 룰에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전체적인 리듬은 그렇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선조적 서사를 구성하고 싶은 욕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지구 위 무수한 인간들이 보내온 삶의 편린들을 그 질서 속에 배열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지구상의 다양한 인간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있으며 국적, 민족, 외관과 성별이 야기한 차이를 초월한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같은 메시지는 왠지 위험해 보이며 어느 면에서는 불쾌하다.

우선 이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이끌고 있는 가상의 시간대가 단선적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이들은 아침을 맞이한다. 하지만 동시에는 아니다. 누군가의 아침이 누군가에게는 밤이다. 아주 단순한 이 사실을 영화는 무시한다.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동시에 아침을 맞는다. 지구 위의 모든 인간은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음에도 영화 속 지구인들은 하나의 시계를 기준으로 살고 있는 듯 편집되었다. 이것은 이 영화가 지향하고 있는 세계관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단선적인 시간대는 이 영화가 다양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보편성에 관한 것이라는 선언과 같다.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얼핏 아름다운 공존과 평화를 위한 몸짓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를 위한 공존이며, 무엇을 위해 디자인된 평화일까?

일단 이 영화의 단선적인 시간대는 그것이 다 시 인간의 역사로 유비되는 과정에서 성별을 획득한다. 이 영화에 속하는 다양한 영상들을 느슨하나마 엮어주는 큰 틀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다시 장년과 노년이 되는 남성의 삶이다. 소년은 면도를 하며 어른이 되어가고, 학교를 다니는 대신 길거리의 법칙을 먼저 배우기도 한다. 멋진 학교를 졸업해 직장을 얻은 뒤 아버지와 햄버거를 먹으며 그의 삶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을 훔쳐보고,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해 프러포즈도 하고, 거절도 당하지만 멋지게 성공해서 결혼에 골인하고 아버지가 된다.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다가 기절하기도 하고 육아에 지친 아내에게 잘난 척하다가 구박을 받기도 한다. 중년의 남편이 되어서 아내의 잔소리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금혼식을 하며 멋진 황혼을 맞기도 한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시작을 열었던 ‘남자들은 엄마든 아내든 여자 때문에 피곤하다’는 목장 남성의 투덜거림을 농담처럼 증명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여성을 비하하거나 모욕하기 위해 편집된 영상은 결코 아니다. 다만 영화를 지배하는 하나의 흐름이 존재하며, 그것이 남성적이라는 말이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공포

이같은 흐름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은 이 영화의 단절된 시간들을 연결하는 세번의 브리지에서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주제가 <A Day at a Time>이다. 이 노래는 한명의 여자와 두명의 남자가 순서대로 부른다. 여성의 목소리는 첫 번째 파트에 등장하는데 이때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아가들이다. 아가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듯한 가사와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그것은 소년의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 이후 과격한 폭력적 욕망을 말하는 청년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전쟁을 비롯한 폭력적인 장면들이 등장하고 노인의 목소리가 영화를 닫는다. 지배적인 내레이션이 없는 이 영화에서 노래는 내레이션을 대체한다. 그리고 이 ‘육체 없는 목소리(acousmatique)’는 이 영화를 통합하는 질서를 부여하는 데 가장 권위있는 존재가 된다.

여성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남성들처럼 선조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이것을 동질적인 방향성을 거부하는 여성적 존재방식을 형식적으로 구현하려고 한 연출이라고 변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하기에 여성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너무나 전통적인 표상 안에 머물러 있다. 여성은 엄마일 때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다. 쌍둥이들에게 태동을 느끼게 해주는 엄마, 갓 아이를 낳은 엄마,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은 출산장려 캠페인이 연상될 만큼 강렬하고 단순한 메시지를 던진다. 여성들이 아름다워지는 다른 방식은 훔쳐보기의 대상이 될 때다. 지하철 차창 너머나 애인이 들이미는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말없는 여성들은 아름답다.

여기에 남편을 찾아가 매일 무릎 꿇는 여자와 ‘난 남자니까 내 아내는 나에게 존경을 표해야 한다’는 남성의 에피소드가 연결되면 이것은 완전히 재미없는 농담이 된다. 그런 문화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영상 조각들 틈에서 그 문화를 뽑아낸, 그것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웃는 서구인의 카메라를 통해 포착해낸 영상을 선택한 저의는 의심스럽다. 그러다 보니 죽은 아내와 수술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진 육체의 아내를 통해 선사된 감동도 탐탁지 않다. 왜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온전한 육체로 건강하게 존재할 때 그 미덕을 인정받을 수 없는가? 미의 대상으로 찬미되거나 숭고한 육체로 박제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업영화가 아닐 때조차 그토록 힘든 일인가?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주제를 설파하는 마지막 에피소드 속 여성이 발화하는 방식 역시 너무나 고전적이다. 그녀는 울고 징징거리고 히스테리컬하게 하소연하다가 갑작스럽게 삶에 감동한다. 전형적인 여성들의 실존을 계속 보고 있다 보면 그것이 한 주체의 단면을 파편적으로 스크린 위로 소환한 것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이것 자체가 현실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기획은 카메라를 든 주체가 선택된 개인이 아니라 ‘다중’이 되었을 때 어떤 영화가 완성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결과는 홈비디오를 남성적이고 계몽적인 서사 안에 배치하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보기 힘들다. 특히 이 영화가 형식과 내용을 통해 그토록 간절하게 구했던 질서에 대한 갈망과 공통점을 찾으려는 노력도 선한 의지와 달리 낯선 것에 대한 공포감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 영화가 기획에 참여한 이들에게 제시한 질문 중 하나인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의 답변 영상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화면 속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두려워한다. 다른 종교, 다른 민족, 다른 성적 취향에 대한 공포를 진심으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가 이들에게 전해주는 답은 사실 ‘알고 보면 그들은 당신과 다르지 않아’이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주체는 다르다. 공포심이 사라지기 위해서 우리가 익혀야 할 것은 ‘다르지 않다’가 아니라 ‘다른 것은 무서운 것이 아니다’일 것이다. 이 작품은 ‘다중’의 무한한 색채는 카메라의 주체를 분배하는 기발하지만 단순한 발상만으로는 도달하기 힘들다는 교훈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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