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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인지의 패러독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갖는 풍요한 의미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이란영화’로 범주화되어온 로컬시네마에 대한 통념을 일거에 불식시키는 새로운 타입의 이야기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자파르 파나히로 대변되는, 최소한의 설정만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는 이란의 단조로운 드라마들과 달리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이야기 요소들의 섬세한 디자인이 메시지와 극적으로 합일하는 모던한 스토리텔링의 사례로 각별하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흥미를 자아내는 방식은 관객에게 퍼즐을 던지는 동시에 그 해결의 지점에서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를 안기는 이야기의 패러독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민문제에 대한 시각 차이로 별거에 들어가는 중산층 부부 씨민과 나데르의 가정에 일어나는 예기치 않는 분란이 드라마의 줄기를 이룬다. 별거가 시작되면서 나데르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딸 테르메를 돌보기 위해 가사 도우미 라지에를 집에 들이는데, 얼마 뒤 그녀가 연루된 괴상한 사건이 벌어진다. 라지에가 아버지 손을 침대에 묶어두고 외출을 해 치매 노인인 아버지가 봉변을 당하고, 라지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이 사라졌으며, 이에 분을 삭이지 못한 나데르가 라지에를 밀치는 바람에 4개월간 그녀의 배 속에서 자라던 태아가 유산되는 도미노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법정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어찌보면 사소해 보이는 두 사람의 진실공방을 통해 앎과 관계의 본질을 파고드는 윤리극으로 변모한다.

밀봉되지 않는 내러티브

가족과 계급, 이혼, 종교적 신념, 정의, 젠더 정치학 등 이란사회에 퍼진 다기한 문제들에 대한 총체적인 진단으로 이 영화를 읽을 수도 있겠지만 복잡하게 설계된 스토리텔링과 이를 지원하는 명철한 이미지 전략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도 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이야기의 핵심에 다가가기까지 필요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서스펜스의 온도를 비등점까지 추어올린다. 후반부로 갈수록 보기 불편한 진실들이 점증하면서 불안이 고조된다. 중산층 가정에 닥친 위기감의 게이지가 높아감에 따라 관객이 풀어야만 하는 질문은 둘로 요약된다. 하나는 나데르가 라지에를 문밖으로 밀쳐낼 때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나데르가 인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라지에의 유산은 나데르의 폭력적인 밀침이 발단이 되었는가 하는 거다. 이 두 가지 쟁점을 감싸고 있는 인과관계를 해명하면 판관의 판결은 쉽게 내려지겠고, 관객의 의문도 풀릴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고전적이고 포괄적인 동기화를 내장하고 있는, 문제-해결 모델에 기초한 미스터리 해결 스토리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드라마의 관습성은 난폭한 방식으로 부정된다.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초반부 40여분 동안 진행되는 설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락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지만 내러티브가 종착지에 도달하기까지 긴 인과론의 사슬을 촉발하는 중요한 정보들이 흘려진다. 이후 펼쳐질 재판과 공방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이 세팅되고 여러 인물의 법정진술과 인과의 사슬을 형성하게 되는 것도 40여분간의 사건이다. 내러티브상의 틈새를 벌여놓는 이 단락에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핵심 정보를 상냥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별거를 시작하고 라지에가 집에 드나들면서 흘러가는 일상 묘사는 어떤 사건적 중요성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쟁점 해결의 열쇠를 쥔 두 인물의 성격화 방식이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나데르가 합리적 원칙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이에 대해 타협이 없는 ‘이성의 인간’인 반면, 라지에는 종교적 신념을 생명처럼 중히 여기는 ‘신앙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나데르는 셀프 주유소 직원에게 팁을 준 것이 부당하다며 딸 테메르를 몰아붙여 끝까지 팁을 회수하게 하는 완고한 성격의 아버지다. 라지에는 다른 일은 등한시할지언정 코란 앞에서는 신실한 원리주의자로 변한다. 삶에서 중시하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그들은 진실을 입증하려 들고 또 그 원리로 인해 자가당착에 빠진다. 이는 미스터리를 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됨과 동시에 텍스트를 감싼 포괄적인 테마와도 긴밀히 조응한다. 정보의 공백이 메워지고, 플롯의 의문이 드러나는 절정부에서 관객이 좇아온 문제의 해결은 성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식의 갭을 메우는 몇몇 사실이 드러났다고 해서 내러티브가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독창성이다. 목표 지점에 도달했을 때 이야기는 퍼즐 풀기라는 문제-해결의 패러다임을 전복한다. 이야기의 성격이 변질되는 것이다.

윤리극을 완성하기 위한 고도의 장치

수수께끼의 해결, 감춰진 진실의 폭로라는 내러티브의 목표는 클라이맥스에서 급진적으로 전복된다. 애초 설정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했으나, 그 답이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전복성의 실체다. 나데르는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가정교사와 라지에의 대화를 듣고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완전한 인지가 아니다. 나데르가 라지에를 문밖으로 밀쳐낼 때 그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망각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데르는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던 동시에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라지에의 유산은 나데르와의 승강이가 있기 하루 전 무단 외출한 할아버지를 구하려다 차에 치인 것이 발단이 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라지에의 입을 통해 재진술된다. 나데르의 밀침이 라지에의 유산을 유발했다는 인과관계가 부정되는 셈인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라지에가 할아버지의 손을 침대에 묶어둔 비상식적 행위는 전날의 이 무단 외출이 발단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달리 말하면 라지에는 할아버지를 해하려 했다기보다 구하려 한 쪽에 가까우며, 또다시 무단 외출로 빚어질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침대에 손을 묶고 외출한 것이다. 따라서 라지에의 행위는 서툴기는 하지만 순전한 선의의 발로라고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정교한 스토리텔링의 백미가 드러난다. 파라디 감독은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과 라지에가 할아버지를 구하려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 나데르가 라지에를 밀쳤을 때 그녀가 아파트 계단에 뒹구는 장면을 디제시스상에서 생략한다. 라지에가 가정교사와 임신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기 전, 나데르는 라지에와 과중한 가사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다른 방으로 옮기자”는 말을 하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이후 나데르가 대화 내용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디제시스상에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그의 자백을 통해 이를 사후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한 맥락으로 라지에의 교통사고는 거리에서의 다급한 경적 소리로만 은근히 암시된다. 이것은 고도의 전략이다. 중대한 스토리 정보의 은닉을 재판의 쟁점을 미궁에 빠트리기 위한 트릭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윤리극으로서의 참된 가치를 영화에 부여하는 미학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파라디 감독이 핵심 사건을 숨긴 것은 관객을 오해와 착각으로 인도한 유인책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실패한 인과관계’라는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제를 드러낸다. 생략된 사건들은 이 참담스런 비극의 실질적인 동인이 아니기 때문에 보여지지 않는다. 나데르는 임신 사실을 망각했고, 라지에는 할아버지를 보호하려 했으므로 문제가 된 그들의 행위와 거짓말은 신념의 나약함을 입증할 수 있을지언정 비극을 잉태한 진정한 원인은 아니다. 그저 행실이 세련되지 못했을 뿐인 라지에의 가정을 붕괴 직전으로 내몰고,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거짓말도 불사하는 표리부동한 아버지로 나데르를 퇴영시킨 것은 폭력이나 교통사고가 아니다. 두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비극은 폭력과 교통사고라는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놓인 험준한 간격과 분리의 결과다. 그러므로 이성을 상실한 나데르가 자신의 영역 바깥으로 라지에를 내몰기 위해 행했던 폭력적인 밀침은 이 총체적 비극을 야기한 물리적 원인은 아니지만 잠재적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신 사실에 대한 인지와 교통사고 장면이 생략된 이유는 분명해진다. 핵심 사건의 생략은 실패한 인과관계라는 테마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처음 세팅된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결과를 야기한 원인은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여기서 앞서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유발한 의도이다. 나데르가 아버지의 팔에 든 멍자국이 로프로 침대에 묶인 탓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장면, 라지에가 교통사고에 대해 고백하면서 “확실하진 않지만”이라고 단서를 붙이는 것도 모든 인물들이 시달리고 있는 존재론적 위기를 입증한다.

나데르는 들었지만 망각했고, 라지에는 인과관계를 조작했다. 저들의 인지와 신념의 나약함은 완전한 앎과 믿음이 환상에 불과함을 역설한다. 흑백논리가 횡행하는 법리적 판단과 달리 인지나 신념의 나약함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곤경에 빠트린다. 중첩된 인과율의 플롯을 통해 파라디 감독은 주인공들에게 이중적으로 코드화된 역할을 부여한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희생자인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징벌인가. 그러므로 질문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가 인지했는가, 그의 행위가 유산을 유발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위가 유산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비극이 발생했는가? 미묘한 강조 지점의 이동으로 말미암은 내러티브 목표의 뒤틀림은 고전적 플롯의 선형 논리를 폭력적으로 훼손시킨다.

‘감금’ 혹은 ‘분리’라는 그래픽 모티브

그렇다면 자명해 보이는 인과관계를 불능에 빠트리는 망령은 무엇인가? 타인의 사정에 무심한 개인은 뿔뿔이 나뉜 자신의 영역 안에서 그들만의 진실을 쌓는다. 한국어 제목에는 ‘별거’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지만 이러한 테마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문 제목으로 쓰인 ‘분리’(seperation)라는 개념이 더 적절해 보인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다뤄진 화급한 이슈는 삶의 방식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한 부부의 ‘별거’라기보다 계급과 젠더, 믿음, 가치관의 차이를 감싸고 있는 ‘분리’에 가깝다. 분리와 고립은 실내극을 연상케 하는 이 복잡한 이야기 안에서 부단히 강조되는 이미지의 그래픽한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실내장면의 연출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거의 모든 장면이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에너지를 가진다. 인물들은 죄 자기 영역에 갇힌 채 ‘분리’의 형상으로 제시된다. 숏의 구성과 편집에서 공간은 강박적으로 분리되고, 인물들간의 연결을 훼방하는 요소들의 지속적인 간섭이 시각화된다. 남자와 여자의 상호관계를 지배하는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규율들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명예라는 낡은 관념이 진실을 말해야 하는 단순한 원칙과 충돌하는 풍경이 이러한 분리와 고립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된다.

파라디 감독은 한 프레임-한 인물(one frame-one person)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하나의 숏 안에서조차 인물들을 유리시키는 미장 아빔(mise-en abyme) 양식을 일관성있게 밀어붙인다. 한집에 사는 가족들조차 갈가리 찢긴 원자(原子)들이다. ‘감금’ 혹은 ‘분리’라는 그래픽 모티브는 복도와 계단, 방과 거실, 거실과 부엌을 차단한 문과, 창, 유리, 자동차 거울 등 고립된 영역에 인물을 가두는 장치들에 의해 강조된다. 날카롭게 인물들 사이를 가르는 문틀과 창틀 따위의 프레임은 흡사 감옥의 창살 같은 무늬를 화면 안에 조형해낸다. 나데르가 경찰과 한데 수갑을 차고 있는 장면이나 법정에서 열고 닫히는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도 분리라는 모티브를 인상적으로 진술하는 이미지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피의자 신분이 된 나데르는 젊은 경찰과 하나의 수갑으로 묶여 있지만 둘은 완전한 타인이다. 함께 수갑을 찼지만 어떤 영향도 교환하지 못하는 그들은 주변 환경에서 고립된 채 타인의 사정에 무심한 채 살아가는 분리된 세계의 모습을 은유한다. 씨민과 나데르가 이혼에 관해 재판관과 상담하는 오프닝신과 조응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한 맥락 안에 놓인다. 두 사람은 그토록 그들이 아끼는 딸 테메르가 부모 중 누구와 함께 살 것인지 결정하는 선택의 순간에 합석하지 못하고 법정 밖으로 내몰려 복도에 초조하게 앉아 있다. 한 사람은 복도 문 안에, 한 사람은 복도 문 바깥에, 그들의 딸은 법정 안에. 완벽한 분리의 풍경을 보여주는 클로징은 별거를 위한 재판이라는 오프닝과 수미쌍관으로 이어지면서 실패한 인과론이라는 주제에 방점을 찍는다.

개인의 신념과 사회적 판단의 불일치에 기인한 실패한 인과론의 서사로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풍요한 의미를 얻는다. 그러므로 지식 또는 앎의 본질을 들춰내어 인식의 허약함을 숙고하게 하는 이 영화를 ‘이란의 <라쇼몽>’이라고 하는 의견에는 동의가 되지 않는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숨겨진 테마는 단일한 의미로 고정할 수 없는 인간 행동의 미스터리함과 그에 대한 판단의 애매모호함에 있다. 인지하고 있었지만 임신부를 밀친 나데르의 행위처럼 인간의 앎과 신념은 단일하고 영속적이지 않다. 저들은 자신의 지식과 믿음이 단단하다고 주장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의 믿음은 아주 손쉽게 깨지기도 한다. 원칙에 따라 딸 테르메를 훈육하는 아버지로서 나데르가 가장 상위에 두었던 가치와 신앙인으로서 라지에가 소중하게 품어온 삶의 의의는 인과의 논리가 깨진 세계에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사건에 대한 추리가 ‘사실’을 추구하는 것에서 ‘의도’를 추구하는 것으로 전환되면서부터 드라마는 안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알고 있었지만 알았다고 할 수 없는 인지의 패러독스, 나쁜 결과를 유발하는 선의라는 이 실패한 인과율의 순환 속을 심오한 영화의 주제가 관통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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