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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운성의 시네마나우] 영화비평, 길은 있다

포스트 프로덕션으로서의 영화비평

톰 앤더슨의 <로스앤젤레스 자화상>.

지난 9월 열린 토론토영화제 기간 동안 몇몇 영화평론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영화제에서 본 작품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화제는 오늘날 영화비평이 당면한 상황과 앞으로의 변화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는데, 짐작할 수 있겠지만 영화비평의 역할이 이제는 거의 위협적이라 느낄 만큼 축소되고 있다는 의식을 다들 공유하고 있었다. 영화전문지의 구독자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의미있는 비평적 담론들은 소규모의 그룹 내에서만 순환될 뿐 그 바깥에선 완전히 길을 잃거나 버려진 신세가 되고 마는 게 현실이다. 혹은 기껏해야 외우기 쉬운 유사 경구로 압축되어 영화 마니아들의 속물적 허세에나 소용닿을 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좀더 자세히 논하는 일은 본 지면엔 걸맞지 않다. 다만 나는 영화비평의 변모 가능한 양상으로서 ‘포스트 프로덕션으로서의 영화비평’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이는 톰 앤더슨의 <로스앤젤레스 자화상>(2003), 피터 폰 바흐의 <헬싱키, 포에버>(2008) 같은 ‘비평적’ 영화들, 그리고 (얼마 전 본 지면에서도 다룬 바 있는)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시계>(2010) 같은 영상설치 작품들, 그리고 보다 대중적인 형식으로는 <뉴요커>가 제공하는 <이주의 DVD> 같은 비디오 포드캐스트 등을 보면서 떠올린 것인데, 이런 작업들에서 작가의 역할은 주로 (일종의 레디메이드 오브제로서) 기존의 영상물들을 다루는 일에 한정되지만 여러 수준의 비평적 입장에서 자유롭게 그것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이미지의 아카이브가 상당량 축적된 이후에야 출현 가능한 형식으로서- 이 형식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나 1990년대를 거치며 확산된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오리지널 이미지의 생산이 아니라 기존의 생산물을 편집을 통해 재구성하는 작업, 즉 후반작업 공정에 가까운 활동이다. 그러한 활동이 영화에 대한 비평적 태도와 결부되어 수행될 때 우리는 그것을 포스트 프로덕션으로서의 영화비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것은 여전히 한편의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텔레비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사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되는 작품들에 ‘포스트 프로덕션’이란 용어를 처음 적용한 이는 프랑스 미술평론가 니콜라 부리오인데, 원래 이는 1990년대 초반부터 미술계에서 중요한 흐름으로 떠오른, 기존의 작품들을 기반으로 디제잉하듯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경향 일반을 가리키기 위한 개념이었다. 부리오가 보기에, 이러한 포스트 프로덕션으로서의 예술작품은 “정보화 시대에 점점 확산되어가는 전 지구적 문화의 카오스에 대한 응답”(<포스트 프로덕션: 스크린플레이로서의 문화>(2001))이었다. 그가 특별히 영상 관련 작품만을 염두에 두고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하고 있는 건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작품을 만들고 우린 그걸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우린 그걸 우리 자신을 위해 활용한다.” 여기서의 일이 비평적 활동이라면 우리는 장 뤽 고다르의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함께 고려하는 것으로 포스트 프로덕션으로서의 비평에 대한 정의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들은 이제 영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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