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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여성주의 웨스턴의 탄생

올해의 영화 <믹의 지름길>

<믹의 지름길> Meek’s Cutoff(2010)

감독 켈리 리처드 상영시간 103분 화면포맷 1.37:1 스탠더드 / 음성포맷 DTS-HD 5.1, PCM 2.0 자막 영어 / 출시사 오실로스코프(미국, 2장) 화질 ★★★★☆ / 음질 ★★★★☆ / 부록 ★☆

얼마 전 두 감독에게 그들이 택한 화면 사이즈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공히 ‘영화적’ 선택이라고 답했다. 10년 내에 만들어진 작품 중 화면 사이즈가 각별한 기억으로 남은 건 딱 두편이며 둘 다 ‘아카데미 비율’로 찍혔다. 하나는 칸 영화제에서 본 <엘리펀트>다. 거대한 스크린에 박힌 4:3 사이즈의 영상이 에메랄드빛 하늘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HBO> 방영용으로 제작된 영화라서 4:3 사이즈라고 알려져 있지만 믿긴 힘들다. 이전부터 <HBO>가 1.78:1 비율의 영화를 제작했거니와 구스 반 산트가 단지 TV 방영용이란 이유로 그 비율을 선택했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충격의 복도’를 체감하기에 스탠더드 비율만한 게 없다고 여긴 것 같다. 실제로 이 영화의 스탠더드 버전과 와이드 버전을 비교해보면 전자의 폐쇄감과 공포감을 후자의 그것이 따라가지 못한다. 아래위와 좌우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그 느낌이 4:3 사이즈의 <엘리펀트>에 있다.

다른 하나는 지난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믹의 지름길>이다. 지난해 같은 영화제에서 보았던, 마찬가지로 4:3 사이즈인 페드로 코스타의 작품보다 <믹의 지름길>이 준 충격이 더 컸다. <믹의 지름길>은 일군의 개척민들이 강을 건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처음엔 영사실에서 마스킹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상영하는 걸로 오해했다. 보통의 화면 구도에서 인물에게 할당되는 비중은 완전히 무시되어 있었고,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위로 황폐한 산과 아래로 푸른 강이었다(블루레이보다 스크린으로 볼 때 더욱 실감된다). <믹의 지름길>에서 화면 사이즈는 곧 영화의 주제다. 켈리 리처드는 서부의 숨은 역사를 새로 혹은 고쳐 쓰려는 게 아니다. 그녀는 웨스턴 장르의 원형을 불러와 질문을 하려 한다. <믹의 지름길>은 문명과 야만이 대면하고 선과 악이 충돌하며 영웅이 탄생하는 장르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왜 그랬죠?”라고 묻는 작품이다. 4:3 사이즈는 필연의 선택이었다.

4:3 화면비의 마력

1845년, 세 가족이 ‘오리건 산길’을 따라 지름길로 이동하며 정착할 땅을 찾는다. 길을 안내하는 자는 믹이라는 사내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를 불신하기에 이른다. 아무리 걸어도 물과 약속의 땅이 나타나지 않는 탓이다. 그들 중 몇은 믹을 영국의 첩자로 의심한다. 믹이, 개척자를 외딴곳으로 따돌리는 임무를 띤 사람이라는 거다. 물과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길을 잃은 그들은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 와중에 그들은 인디언 한명을 생포한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그들은 어느덧 인디언의 뒤를 따르게 된다.

카메라가 간혹 인물에 다가설 때에도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들의 얼굴은 모자와 보닛에 가려져 있다. 주인공 에밀리 역의 미셸 윌리엄스를 알아차리려면 10분이 지나야 한다. 그나마 그녀의 얼굴은 흙바람을 잔뜩 뒤집어쓴 상태다. 게다가 인물들이 속삭이거나 우물거리는 소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으며, 대신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와 메마른 땅 위로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인물들은 19세기 중반의 황야에서 방황하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는 품지 않는다. 구원자로 나설 영웅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들은 황무지처럼 헐벗은 상태로 걷고 또 걷는다. 리처드는 노련한 작가가 카메라를 쥔 듯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세계를 단순 명료하게 재현한다. 이것은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한 서부의 모습이다. 서부의 전설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옛 서부인의 지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일곱 개척자의 처지는, 리처드의 전작 <웬디와 루시>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알래스카로 향하는 웬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공교롭게도 웬디가 영화 내내 맴도는 공간도 오리건이다). 그들이 찾아 헤매는 건 두 번째 에덴이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건 함께 곡식을 가꾸고 음식을 마련해 먹을 수 있게 해줄 터전이다. 그러니 악당에게 총을 쏠 이유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카메라는 자연스레 여자들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믹의 지름길> 이전에 만들어진 어느 서부영화가, 보닛을 뒤집어쓰고 긴 치마를 치렁거리며 무리를 뒤따르는 여자에게 주목했던가. <자니 기타>에서 레이스와 치마를 휘날리며 여장부로 행세하던, 그래서 서부영화의 어떤 인물보다 쾌감을 안겨준 두 여자주인공조차 <믹의 지름길>의 여자들 앞에서는 허세에 불과하다.

서부로 가는 여자

세 여자가 등장한다. 간혹 공포에 떨고 눈물도 보이지만 그들은 공동체의 바탕을 책임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가사를 포함해 여성들이 맡았을 일거리는 기존의 서부영화에서 막연하게 암시되는 정도를 넘어 표현되지 않았다. <믹의 지름길>은 그런 짐작일랑 버리고 여성의 노동을 직시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식한다. 그들은 칠흑 같은 새벽에 불을 피워 음식을 준비하고, 물을 관리하고 땔감을 구하고 곡식을 갈며, 틈틈이 뜨개질을 하거나 입고 다닌 무거운 옷가지를 세탁한다. 그러다 무리가 이동을 할 때면 뒤에 남아 천막을 갠 다음 마차 뒤편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평자들은 <믹의 지름길>을 새로운 웨스턴으로 평하면서 이 영화의 여성적 측면을 언급한다. 물론 위에 말한 점들이 영화의 그러한 특성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여성주의 웨스턴’이라 부르도록 만드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도입부에서 소년은 성경의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구절을 읽는다. 그것이야말로 개척자들이 갈망하는 대상인데, 결말부에서 그들은 황야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한 그루 앞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믹의 지름길>은 삶의 나무에 도달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에 관한 영화일까. 버티고 선 나무는 믿음을 시험하는 또 다른 유혹이다. 마침내 고개를 숙인 믹은 에밀리의 남편이 뜻하는 대로 행동하겠다고 말하는데, 카메라는 방향을 틀어 에밀리와 인디언을 바라본다. 영화는 길을 잃은 인물들 사이에서 미래를 성찰하는 인물로 에밀리를 지목하며, 그 지점에서 에밀리는 <웬디와 루시>의 웬디와 같은 길 위에 놓인다(미셸 윌리엄스가 두 역할을 모두 연기했다). 웬디가 마주친 두 남자는 상반된 이야기를 전했다. 늙은 경비원은 “모두 잘될 거야”라고 말했고, 부랑자는 “우린 길을 잃었어”라고 읊조렸다. 오리건을 떠나는 열차를 훔쳐 탄 웬디가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맡긴 것처럼, 150년 전 동일한 자리에서 에밀리 또한 같은 질문을 떠안는다. 영화는 모든 것이 시작되는 시간에 여성에게 길을 물음으로써 서부라는 공간의 주체로 여성을 세운다. <믹의 지름길>은 (이미 도착한) 미래의 길을 여성의 시선에서 찾은, 아마 유일한 서부영화일 것이다.

<믹의 지름길>은 인디언이 무리로부터 멀어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하겠다. 화면 너머로 길을 떠나는 자는 고독한 카우보이가 아닌 정체불명의 인디언이고, 관객은 에밀리의 시선을 빌려 점점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인디언을 뒤쫓는 에밀리는 혹시 알았을까, 인디언과 그녀의 존재는 서부의 역사에서 기억되지 않으리란 것을. 그리고 그 순간, <믹의 지름길>은 끝내 서부의 잊혀진 역사에 관한 서늘한 증언을 남긴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코언 형제의 <더 브레이브>는 한 소녀가 훗날 기억하게 될 서부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믹의 지름길>은 소녀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은 다른 데 있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믹의 지름길>의 블루레이는 DVD와 합본으로 출시됐으며, 영화만큼 소박하고 조용한 현장을 담은 짧은 메이킹 필름(10분)과 예고편을 부록으로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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