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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초월적이도다

미켈란젤로 프람마르티노의 <네 번>을 알레고리로 읽어보니

예술의 표현방식 가운데 알레고리라는 게 있다. 표면에 드러난 것을 통해 내면의 숨은 뜻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솝 우화>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데, 동물들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사람들의 삶을 비유하는 식이다. 은유 또는 상징과는 약간 다르다. 이들이 비교적 단일한 의미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알레고리의 의미는 주관성이 개입되기 때문에 다층적이고 모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의미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풍부한 해석을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탈리아의 신예 미켈란젤로 프람마르티노의 <네 번>(2010)은 전형적인 알레고리 영화다. 표면만 보자면 이탈리아 남부의 어느 시골에서의 일상이라는 대단히 간단해 보이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심층에는 삶과 관련된 사뭇 본질적인 테마를 담고 있다. 그 테마를 전달하는 방식이 알레고리이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의 형식적 특징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사뭇 영화는 농촌에서 염소를 키우는 노인의 평범한 일상과 죽음 그리고 윤회에 관련된 것으로만 보인다. 그런데 표면은 밋밋할 정도이지만, ‘어떤’ 일상과 죽음인지에 대한 심층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선 화면에 드러난 이야기부터 요약해보자. 이야기는 네개의 장으로 구분할 수 있고, 각 장에는 뚜렷한 주인공이 하나씩 있다. 먼저 첫장에는 노인, 두 번째에는 염소, 세 번째에는 나무, 그리고 마지막에는 숯이 주인공으로 설정돼 있다. 주인공이 사람에서 동물, 식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광물로 연결되는 셈이다.

‘목자와 어린 양들’

배경은 이탈리아의 최남단 칼라브리아주에 있는 중세도시 카울로니아(Caulonia)이다. 중세도시들이 대개 그렇듯, 도시는 산꼭대기의 성벽 안에 건설돼 있다. 중세의 참혹한 전쟁 때문에 이런 형태의 도시가 생긴 것인데, 정상에서 적의 공격을 감시하고, 또 수비를 잘하기 위해서다. 이 도시 초입에 100여 마리의 염소를 키우며 사는 노인이 있다. 홀로 사는 그는 자신의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노쇠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도시 아래의 구릉에서 염소들을 방목한다.

그런데 평범한 이야기가 흥분되기 시작하는 건 노인이 교회의 먼지를 마실 때부터다. 그에겐 질병이 하나 있다. 기침이 심해서 잠을 못 잘 정도다. 기침을 멎게 하는 건, 어이없게도 교회의 먼지다. 그는 염소젖을 교회에 가져가서, 먼지 한줌과 바꿔온다. 평범한 노인이 교회 문을 드나들면서 성물(聖物)을 받듯 먼지를 얻어오고, 이것을 마치 약처럼 물에 타마실 때, 알레고리의 속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교회의 먼지, 이것은 재 같은 것인데, 죽음의 강력한 상징이다. 바로크 시절 바니타스의 정물화 속에 그려진, 재처럼 썩어가는, 혹은 먼지로 변해가는 해골과 책들을 기억해보라. 삶의 허무를 그려댄 정물화에 따르면 존재의 끝은 먼지다. 그렇다면 지금 노인은 교회의 먼지라기보다는 성인의 죽음에 관련된 광물(재)을 마시고 있는 셈이다. 예수의 주검에 빗대, 사도들이 포도주와 빵을 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재를 마시는 행위에는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내재돼 있는 셈이다.

감독 프람마르티노(1968~)는 밀라노 출신이다. 굳이 먼 남쪽의 중세도시에서 이 영화를 만든 데는 이 지역의 문화적 배경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곧 지중해 문화, 더 나아가 유럽 문화의 토대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지리적 근접성도 작용했을 것인데, 그리스의 신화(헬레니즘)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종교(헤브라이즘)가 허공의 담론으로만 떠도는 게 아니라, 주민의 실제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 이탈리아의 남쪽이다. 게다가 영화의 주 공간인 카울로니아는 중세도시다. 현대의 유행과는 매우 동떨어진 곳으로, ‘달팽이’처럼 느리게 사는 곳이다. <네 번>에서 신화와 종교가 겹쳐 떠오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먼지가 재라면 노인의 정체성도 달리 보인다. ‘목자와 어린 양들’이라는 모티브는 종교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테마다. 푸른 들을 배경으로 가운데 흰옷을 입은 예수가 있고, 그의 주변엔 역시 흰색의 양들이 함께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목자가 세상의 가운데서 양들을 이끌고 있는 대단히 평화로운 내용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시골의 평범한 노인의 일상에 느닷없이 숭고한 예수의 삶이 겹쳐지는 것이다. 도입부의 ‘노인과 염소들’이 ‘목자와 어린 양들’의 은유로 보이는 까닭이다.

예수의 수난극, 8분간의 원 숏 원 시퀀스

어느 날 밤, 노인은 자신의 먼지 봉투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된다. 기침은 그치지 않고, 노인은 뒤늦게 허겁지겁 교회로 달려가는데, 몸에서 계속 염소들처럼 방울소리가 난다. 노인은 낮에 방목을 하고 돌아올 때, 길에 버려진 방울 하나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그게 자꾸 딸랑딸랑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 소리 때문인지 노인의 모습에서, 자꾸만 염소가 연상된다. 노인은 교회 문을 열심히 두드리는데, 불안하게도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아무도 나와줄 것 같지 않다.

이튿날 아침, 마을에선 축제가 열렸다. 나무로 만든 큰 십자가를 메고 예수의 수난(Passion) 행렬을 재현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수난 행렬을 찍은 이 시퀀스가 <네 번>의 가장 압권인데, 대략 8분 동안 이 모든 과정이 단 한번의 편집 없이 한숏으로 처리됐다. 원 숏 원 시퀀스(One Shot One Sequence)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골고다 언덕처럼 경사진 이 마을에 로마 병정 복장을 한 남자들이 나타나고, 자신들이 타고 온 조그만 삼륜 트럭을 비탈에 세운 뒤 버팀목을 받치고, 곧이어 북소리가 들리며, 십자가를 멘 예수가 보이고, 이들이 노인 집 앞의 내리막길을 지나갈 때까지 카메라는 조감하듯 약간 공중에서 이 모든 과정을 한번에 찍는다. 마을은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골고다 언덕처럼 보인다.

관객은 영화의 형식을 의식할 때 사유를 시작한다. 수잔 손택이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상찬하며 주장한 것이다. 말하자면 관객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창의력을 의식할 때 지적 이해의 경로를 통한 감동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아마 많은 관객이 여기 8분간 이어지는 ‘수난 시퀀스’에서 알레고리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할 것 같다. 이쯤 되면 표면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또는 밋밋한 것 같은 표면이 대단히 복잡해지는 것이다. 관객은 끊임없이 표면의 아래를 생각하게 되고, 그 경험의 시간이 <네 번>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다.

‘수난 시퀀스’의 주인공을 꼽자면 노인이 방목할 때 데리고 다니는 개다. 개는 로마 병정들이 도착할 때부터 짖기 시작하더니, 그들이 언덕으로 올라간 뒤에는 수난극의 여성 역할을 맡은 사람 앞에서도 뭔가를 간절히 말하고 싶은 듯 맹렬히 짖는다. 그녀도 떠나고, 또 다른 소년이 나타나자, 이번에도 맹렬하게 짖어댄다. 소년이 꾀를 부려 피해간 뒤, 개는 트럭 뒤의 버팀목을 빼내고, 트럭은 뒤로 미끄러져 노인의 염소 우리를 처박고 만다. 어떻게나 개가 이리저리 뛰면서 짖어대는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인데, 놀랍게도 개의 그런 행위도 편집의 도움 없이 수난극이 펼쳐지는 원 숏 원 시퀀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마 그 개는 주인의 변한 모습(죽음)을 간절하게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부서진 우리에서 나온 염소들이 신기하게도 노인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고, 이들은 마치 장례식의 자식들처럼 노인 옆에 모여 있다. 곧이어 우리는 침대 위에 죽어 있는 노인을 본다.

희생양과 아기 염소

영화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목자와 어린 양들’이 떠오르는 ‘노인과 염소들’을 봤는데, 이젠 마을에서 예수의 수난극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노인의 주검을 보는 것이다. 노인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 곧 방목, 먼지 구하기, 달팽이 줍기, 우유배달 같은 사소한 일들을 40분 정도 관찰해온 관객으로서는 약간 당황스런 죽음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노인이 중간에 죽어서이기도 하고, 또 어느 볼품없는 노인의 죽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젊은이와 강력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염소가 된 듯, 방울소리를 딸랑이던 노인이 죽자마자, 아기 염소가 태어난다. 노인의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관련을 맺는 것인데, 동양에서도 익숙한 개념인 윤회가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염소가 태어나는 곳, 곧 외양간도 앞의 알레고리와 연관지어 바라보면 성소(聖所)다. 따라서 이 탄생(Nativity)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듯 예수는 여관을 구하지 못한 사정 때문에 추운 겨울에 외양간에서 태어난다. 탄생의 순간은 수많은 종교화를 통해 볼 수 있다. 아기 예수가 외양간의 구유 혹은 바닥에 누워 있고, 마리아와 요셉이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식이다. 여기에는 외양간의 소와 나귀도 반드시 초대된다. 르네상스 화가 프라 안젤리코의 <예수 탄생>(1441)도 바로 그런 모습을 잘 담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는 동물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노인과 마찬가지로 아기 염소에서도 종교적 의미가 중첩돼 있는 셈이다.

게다가 염소는 양과 더불어 사람을 은유해왔다. 자식을 대신하여 희생의 제물로 쓰이던 게 어린 양 혹은 어린 염소다. 카라바조의 <이삭의 희생>(1603)을 떠올려보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을 때, 자식 바로 옆에는 어린 양이 보인다. 신의 허락으로, 이삭 대신 그 옆의 양이 희생양으로 쓰인 것은 잘 알려진 대로다. 양과 염소는 특히 울음소리가 아기의 그것과 비슷하여, 사람의 은유로 수용됐다. <네 번>에서 우리는 막 태어난 어린 염소가 애처로울 정도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계속 듣는다.

두번의 에피소드를 통해 감독의 의도는 거의 전달된 것 같다. 영화는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혼의 윤회에 관련된 것인데, 그 죽음에는 예수의 그것처럼, 희생이라는 이타성이 개입돼 있는 것이다. 수난에 관련된 8분간의 롱테이크도 따지고 보면 ‘이타적인 죽음’의 의미를 표현하고픈, 또는 관객에게 간절하게 전달하고픈 감독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이 테마를 다른 주인공을 내세워 반복하는 셈이다.

나머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아기 염소는 방목의 첫날 불행하게도 구렁에 빠진 뒤 겨우 빠져 나왔는데, 결국 무리에서 떨어져 외톨이가 된다. 혼자가 된 염소는 밤이 되자 추위를 피해 전나무 아래서 잠을 청하는데, 아쉽게도 죽고 만다. 염소가 죽은 자리의 전나무는 숲에서 가장 푸르고 키 큰 나무로 자란다. 봄이 되자 주민들이 축제용으로 쓰기 위해 그 나무를 베어갔고, 축제가 끝난 뒤, 이 나무는 숯장수들에게 팔린다. 곧 전나무의 죽음도 숯을 통해 재탄생의 과정을 거쳤고, 역시 희생의 죽음이라는 테마를 반복하고 있다. 정리하면 염소-전나무-숯의 순환이다.

로베르 브레송이 떠오른 이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거대한 흙무덤인데, 숯을 만드는 가마다. 숯장수들이 큰 가마 속에서 나무를 불에 태워 숯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말하자면 죽음(무덤) 속에서 새 생명(숯)이 잉태되고 있는 셈이다. 축제의 나무로 만든 그 숯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노인이 도입부에서 먼지(숯의 재)를 타 마신 행위가 윤회의 또 다른 단계인 것도 이해될 것 같다. 노인(사람)-염소(동물)-나무(식물)-숯(광물)의 네 단계는 순환하며 영속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희생으로서의 죽음이라는 표면 아래의 테마를 반복하여 만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 프람마르티노가 만든 <네 번>은 신화와 종교라는 지극히 이탈리아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이타적인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런 순환의 영속성을 그리고 있다. 지극히 밋밋한 표면인데, 사실은 ‘초월적인 것’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는 폴 슈레이더가 주장한 ‘초월적 스타일’의 전형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영화계에 로베르 브레송과 견주고 싶은 대단한 시네아스트가 한명 나온 것이다.

(감독 미켈란젤로 프람마르티노의 이름은 표기법상으로는 ‘프라마르티노’라고 하는 것이 맞지만, 이 글에서는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식 표기법에 더 가까운 ‘프람마르티노’로 적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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